문화재 자료

의령 의병박물관 답사

청풍헌 2021. 8. 26. 20:41

의병박물관

의령의 의병박물관을 갔다. 통상 지역 이름을 쓰지만 이곳은 의병을 특화한 박물관이다. 그래서 이름도 의병박물관이다. 특히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유품과 다른 의병장들의 유품도 전시되어있었다. 임진왜란은 군관민이 합심하여 전쟁을 치르고 극복했다.

일본은 15세기 말 각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들이 100년간의 전쟁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초로 일본을 통일하고 그 힘의 균형을 분산하고자 조선을 넘어 명을 치려고 침공하였다. 20만 대군으로 침범한 일본은 도요토미의 공명심과 정복욕, 명나라와의 통상 제계,, 영주들의 힘의 분산 등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200년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양반 지배층의 붕당정치로 권력 다툼이 일어나 일본 침략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다. 일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무시되고 아무 준비 없이 일본의 침략을 맞게 되었다. 1592413일 부산을 필두로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당했다. 두 달 만에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당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갔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4일 후 조선조정은 이일과 신립을 보내 대항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신립은 탄금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 분개한 백성은 도성에 불을 지르고 분노했다. 왜군이 함경도까지 진격하지 의주로 대피하고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1592422일 의병을 수천 명 모집하여 붉은 비단으로 옷을 입고 천강홍의장군이라 칭하고 의병을 이끌었다. 경상우도에서 일어난 곽재우 의병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었다. 의병은 특별한 사람이 지원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지원하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뛰어난 전술로 연전연승한 의병은 곽재우를 중심으로 경상우도를 넘어 좌도에까지 확대되었다.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은 전국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곽재우 의병군의 대표적인 전투는 기강 전투,, 정암진 전투, 화왕산 전투가 있다.

오늘날 의병의 의미는 곽재우 장군의 당시 심정으로 대신한다.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나라의 보살핌을 받은 지가 이백 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위급함에 모두 자기 보전 계책만 세우고 나라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는다. 이제 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삼백 고을의 남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니,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전쟁을 기록한 난중일기는 여러 사람들이 남겼다. 이순신의 일기을 필두로 오희묵의 쇄미록, 윤탁의 구산실기, 망우집 등등이 있다.

의령에 왔으니 의령소바와 망개떡 맛은 봐야지 하며 시장으로 갔다.

-의령박물관 리플랫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