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여행 이야기

큐슈 역사탐방2 임진왜란의 아픈 추억(히젠 나고야성)

청풍헌 2014. 4. 21. 08:53

당일 사시에 접수한 가덕진 첨 절제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 등의 긴급보고에 의하면 응봉의 봉수감고 이등과 연대감고 서건등이 와서 고하기를 오늘 4월 13일 신시에 왜선이 몇 십척인지 대략 보이는 것만도 90여척이 본토를 나와서 좌도의 추이도를 지나 부산포로 향하는바 까마득 하여 그 척수를 상세히 헤아려 볼 수는 없었으나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고 하므로 첨사로서는 방략에 의거 하여 부산과 다대포의 우요격장으로 하여금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바다로 나가 대비케 하였다.

바야흐로 임진왜란이 시작되는 날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광경을 적은  문서인 임진장초에 나타난 기록이다.

히젠 나고야성을 출발한 왜병이 구름 같이 부산포로 몰려와는 광경을 응봉의 봉수감고와 연대감고가 처음 발견하고 보고를 한다.

7년 전쟁의 비극이 시작 되었다.


<서로 지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배에서 내려,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고, 서로 빼앗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들과 산, 성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불에 탔다. 사람을 베고,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조이고, 부모는 아이를 살려달라 애원하며, 아이는 부모를 찾고... 이러한 비참한 광경은 처음본다.> 

<조선의 아이들을 붙잡아, 부모를 베고는 두 번 다시 못보게 하여, 서로 울고 불고 하는 모습은 마치 지옥의 고통을 보는것 같다.>

이 글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에 출병한 오타 기즈요시의 종사승從軍僧 게이넨慶念이 전장의 참상을 목격하며 기록한 조선일기朝鮮日夕記의 한 구절이다. 


이곳은 일본 큐슈 사가현 가쓰라시에 위치한 히젠나고야성肥煎明護居城으로 일본의 특별사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유적지다.

일본의 유적지 발굴은 오래 천천히 그리고 완벽하게를 지향 하는것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철군을 명령할 때 다른 곳으로 오도록 하고 이곳을 허물어 가쓰 성을 쌓고 폐성 시켰다.

1926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 1955년 다시 특별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존 정비를 하다 본격적인 복원은 1976년부터 나고야성터 및 진영보존정비사업을 하고 있다.

박물관은 1993년에 세워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다이묘들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하여 침공 했다는 설과 

총무사령과 해적정지령을 시작으로 도요토미 정권의 국내여러 정책의 연장선에서 대륙을 침략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국내에는 공명심에 혹은 정벌욕으로 침공 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논하면 임진왜란을 빼 놓을 수 없으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아야 함을 지당한 이치다.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을 모아서 출전을 한 이곳을 살펴보고 

나고야성 박물관이 어떻게 한일 역사교류의 장으로 운영 되는지를 알아 보고자 한다.


박물관 도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교류를 해왔습니다. 임진,정유왜란(1592~1598)은 그 관계를 일시 단절 시켰던 불행한 역사 였습니다.

나고야성 박물관은 이 전쟁의 반성위에 나고야 성터를 일본 열도와 한반도와의 긴 교류의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 

그 역사적 위치를 밝히므로써 앞으로 양국의 교류와 우호의 추진거점이 될 것을 목표로 하고있습니다. (중략) 

임진왜란은 어디까지나 명나라를 침공하기 위한 명제였지만 정유재란은 명나라와의 강화조약중 하나였던 한반도 남부 4도의 실질적 지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장:히데요시의 당입唐入 의사표시에서 대륙침공으로의 포석이 되어간 국내 여러 정책을 살펴본다. 

        쓰시마 소씨가  했던 조선과의 교섭 중 통신사를 복종사로 오인하여 침공명령을 내리게 된다.

2장:부산진의 전투로 시작되는 전쟁과 히데요시와 여러 다이묘들의 생각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응 및 강화교섭 실태를 알아 본다.

      개전초기 한양, 평양, 함경도까지 진격 했으며 이후 추위와 의병, 명나라의 지원 등으로 군세가 기울어 명나라와의 강화교섭을 한다.

      이후 진주성 전투와 동시에 남부지방에 왜성을 축성하고 주둔 시킨다. 강화교섭이 실패된다.

3장:정유재란의 발발과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철병까지의 경과를 설명한다. 한반도 남부를 빼았을 목적으로 남원성과 울산성을  무대로 한 격전이 일어난다.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전쟁과 전후처리를 알아본다.

4장:전쟁에 사용된 무기류와 성곽 등을 알아본다. 일본군의 대포와 철포, 화승총과 칼, 창으로 무장 했으며 특히 조선 수군의 대형 화포의 위력이 발휘했다.

5장:전쟁이 초래한 것들, 즉 포로의 연행과 도자기 문화 및 인쇄술 이입등을 검증한다. 에도 막부 성립후 조선통신사 파견의 우호관계를 밝힌다.


본 전람회는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임진 정유왜란이라는 이 전쟁을 400년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역사적 구석에 밀어 넣어 둘 것이 아니라 

무었보다 그 실태를 먼저 제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기획 되었다. 전시된 자료들은 일한 상방에 걸쳐 실로 명확하고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전시회를 관람한 분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전쟁의 비참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평화와 생명의 존중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혼마루 기념탑에서

▲나고야성 박물관 한글 안내판

▲박물관 입구 하루방(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승

▲성의 모형

                               ▲지도

                              ▲교지?

                              ▲수월관음도(1310 고려)

▲이 묵서명에 고려에서 제작되어 1391년 가가미 신사에 봉납되었다라고 기록

                             ▲설사장과 정연씨

▲거북선

                              ▲전라좌수영대첩비 탁본과 명조 팔사품 복제품


▲병풍도

▲히데요시 목상

▲갑옷위에 걸쳤다는 옷

▲한국 관련 사진

▲명성왕후?

▲전쟁에 참여한 전국의 다이묘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전쟁은 약 7년간 걸쳤으며 그 피해는 조선의 전 국토에 미쳤다. 

이런 전쟁의 출병 기지가 된 곳이 히젠나고야성이다. 

전쟁에는 일본의 거의 모든 다이묘(大名)들이 참가 했으며 대륙에 가까우면서 천연의 좋은 항구를 가졌던 이곳 나고야에는 

극히 단시간에 대단위의 도시가 탄생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성을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다이묘들은 나고야성  주변 약 3km 안에 각각 진영을 건설한다. 

이들 약 130여곳의 진영은 지금도 절반 정도가 성벽과 토루가 남아있다.


▲전망대 현황판을 도자기로 만들었다.

▲멀리 보이는 다리 아래에는 섬이 두개나 있다.

▲백제 무령왕이 태어 났다는 섬

▲혼마루(본성) 표석








▲천수각터에서 내려다 본 광경

▲천수각 터

▲무너진 고성



▲황성의 달이 생각나는 고성

▲사쿠라는 떨어지고

▲제주올레의 간세가...

▲고성

▲무너진 성벽에 나무가...


1592년 명나라을 침공하기 위하여 길을 비켜라던 일본은 318년후 1910년 조선을 합방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지구촌에는 끊임없이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4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는 자명해진다.


2014.4.8 히젠나고야성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