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나의 이야기

영재 유득공의 渤海考序

청풍헌 2018. 8. 20. 14:08

영재 유득공의 서문

고려는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으로 알겠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살면서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살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살면서 신라라 하였어니 이들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 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하여 발해라 하였으니 이들이 남북국이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차지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그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확장 하였을 뿐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자 왕씨가 통합하여 차지하면서 고려라 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차지한 것은 완전하지만 그 북쪽으로 대씨의 땅을 차지한 것은 완전하지 못하여 어떤 곳은 여진에 들어가고 어떤 곳은 거란에 들어갔다.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은 마땅히 발해사를 급히 편찬하는 것이었다. 이를 가지고 여진에게 “어찌 우리에게 발해땅를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땅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라고 꾸짖으며, 장군 한사람을 보내어거둔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거란에게 “어찌 우리에게 발해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하고 꾸짖으며, 장군 한 사람을 보내어 거두었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여진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되고만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탄식을 금할 수 없구나!

어떤 사람은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 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편찬하겠는가?” 하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발해는중국을 모범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수도 홀한성이 함락될 때 세자 이하 고려로 망명한 자가 10여만 명이다. 그중에 사간이 없었다면 반드시 역사가가 있었을 것이다. 사관도 없고 역사서도 없었다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었다면 예법을 알 수 있었으며, 은계종에게 물었다면 모르는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인데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지었으니, 고려 사람만이 발해의 역사를 역사를 편찬할 수 없었겠는가?

아!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몇 백년 뒤에 비록 편찬하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규장각 소속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도서를 상당히 열람하였기에 발해에 관한 사항들을 편찬하여 군•신•지리•직관•의장•물산•국어•국서•속국의 9고를 만들었다. 세가•전•지라 하지 않고 ‘고’라고 한 것은 아직 역사가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또한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겠다.

갑진년(1784,정조8) 윤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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