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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차(7/8) 가우디 투어-진정한 독창성은 자연으로의 회귀다

청풍헌 2019. 8. 2. 19:14

15일 차(7/8)

8시경 숙소를 나와 하드락 카페로 갔다. 카페 앞에는 여러 사람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에게 예약 표를 보여주니 모른다. 한참 있으니 한국 사림이 보여 물어보니 가우디 투어 할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버스로 이동하여 탑승했다. 가이드는 한국 사람으로 유로 자전거나라의 스페인 가이드 백인필이다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 제조업자였던 그는 가난했지만, 건축에 관한 관심이 남달라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던 바르셀로나로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다. 어릴 때부터 앓아오던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친구가 적으며 혼자 생활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학장은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가우디는 이 지방의 직물업자인 구엘의 후원을 받았다. 까사밀라와 구엘 공원, 가우디의 초기 작품이 있는 콜로니아 구엘 성당과 성 가족 대성당을 차례로 관람했다. 까사밀라는 신도시에 세워진 빌라로 당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세워져 결국 분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망한 건물이라 했다. 파도 물결 모양의 베란다와 해초 모양의 난간을 비롯한 기하학적인 공간 구성으로 당시에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 건축물이 1910년에 완공되었으며 현대 건축물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구엘 공원으로 이동했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불편했지만 노련한 가이드의 안내로 비를 피하며 설명을 들었다. 후원자 구엘이 구입한 언덕 위의 땅에 부자들을 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기본적인 구상을 하고 분양을 했으나 구엘의 변호사와 가우디가 살았던 집 구엘이 살았던 집만 지어졌다가 결국 시에서 매입하여 공원으로 이용되었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엘 공원은 초기에 거주자들의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주택단지 안에는 지형을 고려한 도로망과 다리, 계단 등을 갖추고 공연장 및 물의 이용 방법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기법으로 부지를 조성했다. 공연장 바닥은 마사토로 깔았으며 빗물의 정수 역할을 하고 각 기둥으로 물이 흘러 아래의 도마뱀 입으로 출수 되었다. 공연장 벤치는 인부들을 한 명씩 앉혀 의자의 곡선을 만들었으며 타일 조각으로 유려한 곡선으로 만들었다. 뒤쪽으로 경사지게 해 빗물이 빠지도록 설계했다. 공연장에서 내려오는 회랑도 기하학적인 구조로 만들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건축물이 1914년도까지 건설되었다. 가우디의 특징은 형태와 자재를 자유자재로 이용했으며 당시의 건축 흐름과는 상반되게 설계 시공한 점이다. 모든 건축물(다리, , 기둥, 부지 등등)은 실용적인 것을 넘어 자연과 천지창조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우리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기초가 되는 콜로니아 구엘 성당으로 향했다. 이 성당을 보는 이유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어떻게 설계하고 만들었는지 초기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지역은 작은 마을로 구엘의 방직공장이 있으며 직원들을 위한 사택을 짓고 성당을 가우디가 만들었다. 공원의 나뭇가지를 보며 영감을 얻어 성가족성당의 내부 기둥을 창안했으며 내부 기둥의 기하학적 구조도 이때부터 만들었다고 한다. 작은 성당이지만 내 외부가 유려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성당이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바닷가로 이동했다. 각자 따로 또 같이 이동했는데 나는 혼자라 밥 먹기가 힘들었다. 가이드가 일러준 맛집으로 들어가 어떤 아주머니와 함께 앉게 되었다. 통성명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캐나다에서 살고 있으며 혼자 한 달간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함께 식사해도 되는지 양해를 구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 통영을 한 번 와 봤다는 말에 나중에 혹시라도 올 기회가 있다면 연락하라고 하며 명함을 주었다. 오랜만에 이야기하며 점심 같은 점심을 먹은 날이다


드디어 성가족성당으로 이동했다. 성가족성당은 버스도 가까이 댈 수 없다 하며 멀찍이 떨어진 걸어서 갔다. 성가족성당은 현재도 공사 중이다. 성가족성당의 기원은 1866년 성 요셉 신앙인 협회가 설립되고 1874년 성 가족 성당(카탈루냐어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을 제안했다. 1879년 제안자인 로드리게스 신부가 착공을 못 보고 죽자 1881년 새로운 부지를 구입하고 1882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당시의 도면은 1877년 교구 건축가였던 프란체스크 데 파울라 델 비야르 로자노였다. 건축 과정에서 설계자와 건축 감독과의 의견 차이로 설계자인 비야르가 사임하고 1884528일 안토니오 가우디가 공식 총감독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가우디는 설계도를 변경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초기의 설계보다 훨씬 더 큰 설계를 하여 승인을 받고 작업을 진척시킨다. 1913년에는 모든 일반인을 위한 건축물 작업을 포기하고 성가족성당에 기거하면서 내부 설계도에 전념한다. 가우디는 빛을 중요시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구조적 요소에 반영하여 일 년 내내 시간과 날짜, 계절에 따라 변하는 마법과도 같은 색상을 표현했다. 그날도 정오를 넘긴 태양은 수난의 파사드 회랑으로 노랗고 붉은 색상의 빛이 회랑의 벽면에 가득했다. 가우디는 진정한 독창성은 자연으로의 회귀다라고 하며 자연을 중요시했다.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려면 자연과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했다, 내부의 기둥은 처음에는 하나로 올라오다가 가지를 쳐 지붕을 떠받친다


전체 건축물의 구조는 탄생의 파사드와 수난의 파사드, 영광의 파사드로 나뉜다. 가우디가 완공한 것은 탄생의 파사드와 수난의 파사드다. 정문 격인 영광이 파사드는 공사 중이며 중앙의 첨탑도 공사 중이다, 완공 예정일이 2026년이라 하는데 이때가 가우디가 죽은 100주년이라 한다. 가우디는 1926년 마을을 산책 후 돌아오다가 전차에 치여 신분을 알 수 없을 만큼 허름한 복장 때문에 방치되다가 숨을 거두었다. 영광의 파사드 중앙의 청동 문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복음의 말씀이 새겨져 있고 한글도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