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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 방촌유물전시관 답사기

청풍헌 2021. 7. 25. 13:28

광주 포충사, 방촌 유물전시관 방문기

 

통영충렬사 심원록 연구를 위하여 대학원에 진학했다. 심원록을 연구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지역사회와 통영충렬사에 도움을 주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다. 수업 중에 윤경진 교수님의 조언으로 미 훼철 서원 중 임진왜란과 관련 있는 사당을 검색한 결과 고경명 장군을 사액한 광주 포충사와 송상현 장군을 배향한 부산 동래의 충렬사가 검색되었다. 광주에는 이수경 박사가 계셔서 부탁했다, 자료를 받고 이번 방학 때 방문하기로 하고 조율했다. 김상현 대표와 함께 광주 포충사와 장흥의 방촌유물전시관을 가기로 하고 일찍 출발했다. 더운 날씨에 코로나도 대유행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갈 길을 막지 못했다. 학문의 열기를 누가 막을 수가 있단 말인가?

2시간 40분이나 걸려 지역유산연구소에 도착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이수경 박사와 인사하고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 이미 연락을 했기 때문에 알고 계셨을 것이나 일단 포충사에 관하여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수경 박사는 나의 공부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고 계셔서 나의 고민을 상담하는 편이다.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이다. 한 사람은 박사고 한 사람은 박사 과정이니 두 사람 사이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들은 그 과정을 겪었으므로 서로 통하며 이야기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메모했지만,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고 약간의 혼란이 오기도 했다. 그래도 중요한 요점은 메모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심원록의 연구를 위하여 비슷한 사당을 알아본 결과 포충사가 검색되었고 포충사에 심원록이 있는지 어떤 자료가 통영충렬사와 연관을 지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방문했다. 나의 연구를 위한 사전 조사차 온 것이다. 관련 논문을 두 편 출력하여 읽고 갔다. 포충사에는 심원록이란 단어는 없었으며 포충사지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다. 미 훼철 47개 서원 중에 통영충렬사가 미 훼철 사우이므로 미 훼철 사우 중 광주에 있는 표충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면 논문에 미 훼철 서원 47개의 리스트와 배위인원, 배향인물, 시기, 제향일, 심원록 여부 등등을 조사하여 표로 작성하고, 통영충렬사는 이순신 사당이므로 전국의 이순신 사당 18개를 조사하여 심원록 여부를 확인 후 표를 분석하라 말했다.

포충사는 5위가 지금까지 유지된 것은 가치가 있다.

충렬사가 이순신 단독 배위로 이어진 것은 가치가 있다. 47위를 남겼을 때 누가 조사를 하고 누가 결정을 했는지 궁금하다. 47개 남은 것 중 필암서원, 포충사만 왜 남겼을까? 향교에 속해 있는 동국 18현은 남겨놓았다. 남은 사액서원을 표로 작성하여 유형화시키자. 훼철에 관한 논문이 있을 것이다. 미 훼철 사당을 찾는 것도 좋지만 포충사에는 심원록이 없다. 사액 된 사당을 비교하여 시도록이나 헌관집사록이 있다면 3대 사당(통영, 여수, 아산)에 있으면 방명록을 빼고 헌관집사록만 비교해도 된다. 헌관집사록의 직책으로 비교해도 된다.

헌관은 수영에서는 초헌관이 수사나 인근 진보의 만호, 군현의 군수나 현령이 했을 것이다. 아산 현충사는 유림이 지냈을 것이다. 여수 충민사와 아산 현충사에 헌관집사록이 있으면 47개를 안 뒤져도 된다. 3대 사당에 헌관집사록이 있으면 이것만 비교해도 된다. 하지만 왜 3대 사당만 비교하느냐 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순신 사당 18개 중 사액 사당은 여수 충민사, 남해 충렬사, 통영 충렬사, 정읍 유애사, 아산 현충사이다. 최소 5개 사당은 비교를 해야겠다. 심원록은 영조부터 시작된다. 왜 심원록이 영조부터 있을까? 심원록이 영조부터 남은 것은 조경 통제사가 제승당을 중건할 때와 시기가 겹친다. 그때부터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다. 심원록은 크게 두 부류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방명록이고 하나는 헌관집사록이다. 다른 사액 사당에 헌관집사록만 있으면 그것만 비교해도 석사 논문이 된다. 방명록에 있는 날짜가 삭망, 보름인지 절기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방문 일자를 절기별로 분석해보자. 이순신을 따르던 후손은 이순신 사당에 가보겠다는 후손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일기 보려고 현충사에 간다. 전적지를 찾아간다, 조상현창 때문에 참배한다. 방문자의 목적 중에 인사권자 때문에 인사할 경우가 있다. 방문목적을 분석해보자. 취임 보고, 통제사가 인사고과를 하므로 참배할 것이다. 서론에 배경 분석이 있어야 한다. 왜 다루지 않았냐 하면 나중에 후속 연구과제로 남겼다. 나중에 연구하여 학술지에 등제하면 된다. 아산현충사는 직접 가서 소장님과 학예사님 앉혀놓고 저가 이런 논문을 준비 중인데 엑셀 파일 목록화 있는지 리스트를 좀 보여주세요. 47개 기준은 통영충렬사가 훼철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준으로 삼았으며 통영충렬사는 이순신 사당이기 때문에 이순신 사당 18개를 파악한다. 논문 1절은 47개 사당 기본적인 조사(심원록, 방명록, 헌관집사록)2절은 이순신 사당을 조사하여 심원록 유무를 파악하여 통영충렬사만 유일하게 있더라고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3장에서는 분석하여 나만의 유일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 <논문코칭(2021.07.23. 지역유산 연구소에서) (이수경, 김상현, 김용재)>

점심을 맛있게 먹고 포충사로 향했다. 날씨는 무더웠다. 포충사에 도착하니 관리사무소에서 정기관(전시실)의 문을 열어놓았다. 이수경 박사가 미리 전화로 협조를 구해 놓았다. 고마웠다, 사당에 가서 참배하고 방명록에 통영충렬사에서 왔다고 서명했다. 고경명의 위패와 영정이 있고 좌우로 위패가 두 기씩 있었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전형적인 새로 조성한 유적지 형태였다. 화강암 바닥과 계단, 조경된 나무 등은 어딜 가나 천편일률적이다. 정기관(전시관)에는 각종 문집과 교지, 마상문, 신도비 탁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기관 입구에는 世篤忠貞(세독충정)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세독충정이란 제봉 고경명의 좌우명으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라는 선생의 충의 정신을 담고 있는 글이다. 구 사당을 오르기 전에 충노비가 있다, 충노비는 고경명을 따라 의병에 참여한 봉이와 귀인의 충절을 기린 비로 주인이 순절한 후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으며 이듬해 장남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서 주인과 함께 순절한 충의의 인물이다.

구 사당의 묘역은 古拙(고졸)했다. 외삼문을 들어서니 우선 바닥의 박석이 깔려 있었고 좌우로 동·서재가 있었다. 내삼문을 들어서니 사당이 있었는데 사당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사당 뒤를 돌아가 보니 흡사 통영충렬사의 뒤뜰과 흡사했다. 담장과 박석, 배롱나무 등은 아담하면서 엄숙함이 서린 공간이다. 뒷산이 제봉산이라 하며 고경명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제봉산 뒤편에 생가가 있다. 우리는 관리사무소로 내려와 이수경 박사와 헤어지고 제봉 고경명의 고택과 삼열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삼열비각은 석비는 없고 현판 각이었다. 즉 현판을 보호하는 ()을 짓고 보호하고 있었다.

2시간을 달려 장흥의 방촌유물전시관을 갔다. 이곳도 이수경 박사가 미리 전화하여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잘 안내를 해주었다. 민속품과 장흥 위씨의 각종 문집과 목판 등이 잘 정리되어있었다. 2층에는 존재 위백규의 전시실로 각종 문서와 문집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장흥 위씨에 관하여 여러 조언을 하고 귀갓길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8시다.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저녁 8시까지 12시간을 걸려 답사를 마쳤다. 몸살이 왔는지 토요일에는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일요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복기한다.

나의 논문을 위하여 포충사를 방문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이수경 박사에게 들은 논문 코칭이 큰 도움이 되었다. 결론은 이순신 사당의 심원록이나 봉심록, 혹은 시도록, 헌관집사록을 찾아보고 통영충렬사 심원록의 비교우위를 부각해야겠다. 그 방법으로 미 훼철 서원 47개와 이순신 사당 18개를 표를 만들어 연구 방향으로 삼는 서론에 기술해야겠다.

일단 사액 사당인 남해, 여수, 아산, 정읍을 방문하여 시도기나 심원록, 봉심록이 있는지 파악하고 관련 문서가 있는지 제향의 주체는 누구인지 등등을 알아봐야겠다.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