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紹修書院(한국 최초의 서원)

청풍헌 2022. 1. 16. 09:11

소수서원(紹修書院)(한국 최초의 서원)

통영충렬사와 함께 대원군 서원 훼철 때 남은 곳을 검색하니 유네스코에 등록된 9대 서원이 있었다. 그들 서원 대부분에 심원록이 남아있었다. 몇 곳은 직접 친견을 했으며 서원의 시조 격이 소수서원을 찾았다.

소수서원의 전신은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1495~1554)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세웠다. 그가 46세 되던 1541년(중종 36)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지방을 돌아보니 순흥 향교도 관리가 되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이 공부하던 숙수사(宿水寺)도 폐사가 되어 방치되어 있어 안향을 모실 공간과 향교를 중흥하고자 했으나 지역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주세붕은 주희의 백록동 서원을 언급하며 주자학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이에 경상감사의 허락을 득한 후 향교를 옮겨 세우고 문성공묘를 세웠다. 1543년(중종 38) 8월 서원 건물이 완성되고 회헌(문성공 안향) 영정이 봉안되었다. 백운동이란 동네 이름을 따서 백운동 서원이라 칭했다. 안현(1501~1560)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선현의 사당을 찾아 참배하고 경제적 기반을 이룬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일 때 창건된 지 88년 만인 1550년(명종 5) 2월에 백운동 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최초로 사액을 받았다.

제향 공간

문성공묘는 보물 제1402호로 1543년 완공된 사당이다. 이곳에는 안향(국보 제111)과 안축, 안보, 주세붕을 모셨다. 또한 소수서원에는 주자와 안향, 주세붕의 초상화 외에 이원익, 이덕형, 허목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이들은 남인 계열의 인물이다. 퇴계 이황은 초기 제향 홀기를 수정하여 서원 제향의 표준을 마련하였다. 제향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수를 준하는 공간이 전사청이 있다. 서원 입구에 성생단이 있는데 희생을 검수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향사 때 도동곡(道東曲)을 부르는 것이다. 도동곡은 신제 주세붕 선생이 만든 경기체가로 초헌, 아헌, 종헌 시 부른다.

강학 공간

강학당은 보물 제1403호로 관리되며 강학 공간으로 가장 중심적인 건물이다. 내부 중앙에는 명종이 내려준 소수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수많은 현판이 걸려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장과 임원의 집무와 숙소이며 학구재와 지락재는 유생들의 기숙과 학습의 공간이다. 장서각은 교재와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교류공간

서원 입구 우측에 있는 경렴정은 서원의 교류와 유생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취한대는 계곡 건너편에 있는데 이곳도 유식과 교류의 건물이다. 백운동 경자 바위에는 백운동이라는 글귀를 바위에 새겼으며 붉은 글자로 ‘敬’ 자를 주세붕이 새겼다고 한다.

 

선비의 고장 영주와 풍기를 거쳐 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에서 느낀 감정은 이곳이 조선 성리학의 본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성리학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구 유물인가? 던져버리고 버려야 할 학문인가? 우리의 생활 습속에는 성리학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 부모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천륜이며 자라면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교육이나 교우관계에서 형성된다. 어른을 섬기고 선생을 공경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든 사상의 기저에는 성리학이 깔려있다. 이것은 버려야 할 학문이 아니고 알아야 하며 실천해야 할 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