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세계유산 속의 세계유산 玉山書院

청풍헌 2022. 6. 8. 06:58

옥산서원 답사기

병산서원에서 약 두 시간을 달려 옥산서원에 16시경 도착했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서원이다. 역락문을 들어서니 작은 내가 흘렀다. 내를 건너 들어가면 무변루라는 누각이 있다. 무변루는 교류 공간으로 밖으로는 문이 달려있지만 안으로는 트인 공간이다. 무변루 양쪽은 방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아래에 있었다.

강학 공간인 구인당 전면에는 옥산서원의 현판이 있으며 양옆으로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 있었다. 서재에는 다도회가 열렸는지 관계자가 있어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 이 곳의 각종 서적과 고문서는 전시관에 있다고 하며 전시관은 일반 관광객은 열람이 불가했다. 프로그램을 하면 첫날에 유물전시관을 연다고 한다. 옥산서원은 각종 병화를 비켜가 서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서원으로 칭한다. 옥산서원의 심원록 천···황을 신상구 위덕대학교 교수가 해제를 했다. 해설사의 배려로 회재 이언적과 옥산서원이라는 책을 받았다. 오후 다섯시가 넘어가 퇴근이 바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구인당 뒤편에는 사당인 체인묘가 있다. 왼쪽에는 큰 비각이 있었는데 기대승이 찬하고 이산해가 썼다고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낙수 소리가 들렸다. 두어 바퀴 돌다가 밖으로 나오니 세심대가는 길 안내판이 보였다. 독락당까지 700m라 하여 계곡을 지나 숲속으로 올랐다. 숲속으로 들어서니 어둑해졌다. 숲속 길은 비에 젖어 촉촉하여 걷기 좋았다. 한참 올라 자계천을 건너 독락당 가는 입구를 찾았다. 입구에는 큰 안내판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시간이 다 되었는지 대문이 잠겨 있어 독락당 건물로 가보지 못했다. 몇 바퀴를 돌았는데 구중궁궐처럼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와 계곡 쪽에서 정자와 담장을 관람만 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하고 꼼꼼하게 보고자 했으나 시간이 늦어 대문을 닫은 것 같았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옥산서원으로 왔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자계천이 흐르는 호젓한 계곡에 건립한 서원이며 자계천의 너럭바위에 있는 세심대는 퇴계 이황의 글씨라 한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히 들리는 듯 비 오는 날 옥산서원의 모습은 나의 뇌리에 촉촉이 젖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옥산서원의 공간과 건물

옥산서원의 공간은 무변루가 중심이 되는 출입 관련 시설, 강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 관련 건물, 사당이 중심이 되는 제향 관련 건물, 부속 건물의 4개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건물들은 전면에 강학 공간, 후면에 제향 공간을 형성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정문에서 차례로 문루 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중심축을 이루며, 각 공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지반이 점점 높아지는 형태이다.

외삼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작은 내가 흐르고 있는데, 이곳을 건너면 문루인 무변루가 있다. 무변루는 정면 7,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 각 1 칸에는 누마루가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와 판문을 달아 공간을 제한한 반면, 강당 쪽으로는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을 구성하였다. 무변루 아래층의 가운데에는 문을 달았고, 양측에는 위층 온돌방의 구들과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무변루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마당에 이르게 되고, 마당 정면에는 구인당이 있다. 구인당 정면 좌측의 양진재와 우측 해립재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대청을 통해 연결된다. 구인당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정면 5,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형태는 향교의 명륜당과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원장이 거주할 수 있는 방과 강의를 위한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측면 방은 모두 마당을 향한 창이 없고, 양옆으로 문이 나 있다.

구인당 앞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민구재와 서재(西齋) 암수재가 있다. 두 건물 모두 맞배지붕으로 강당의 기단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 각각 정면 5, 측면 1칸으로 2칸의 대청과 3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인당 뒤편 높은 곳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묘는 옥산서원 중심 건물로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사당 안에는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알묘(香廟謁廟)하고,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8월 중정일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전사청은 체인묘와 직각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 2,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인묘의 측면 폭을 고려하여 건물의 규모가 설정된 듯하다.

체인묘 서북쪽에 서원을 세운 지 5년 뒤인 1577년에 건립된 신도비를 보존하기 위해 지은 비각이 있다. 이 신도비 명은 기대승(奇大升)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처음에 서원 앞 용추 위 암반에 세웠으나 후에 서원으로 옮겼다. 이 신도비가 건립되고 9년 후인 1586(선조19, 丙戌) 기대승이 지은 비명(碑銘)에 양좌동 출신인 성균진사 손엽(孫壁)이 쓴 신도비를 선생의 묘소 앞에 별도로 세웠다. 이 두 신도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7-1, 36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체인묘 담장 밖 남쪽에 경각(經閣)과 문집판각(文集板閣),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고직사는 15칸이나 되는 고청과 서원청 · 창고 · 포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공간은 다른 서원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다. 이러한 규모는 옥산서원의 경제적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유추할 수 있다. 경각은 국왕이 보낸 편지와 글씨, 왕실에서 내려 보낸 책, 선생이 직접 쓴 책 등을 보관했던 곳이다. 그러나 경각이 좁아 이들 문적들을 모두 보관할 수 없어서 선생의 문적은 따로 서원 소속 사찰인 정혜사에 보관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문집판각은 각종 서책들과 서화의 판본 및 선생 문집판본 등을 보관했던 곳이다. 이 판본들로 책을 출판하여 유림에 반질하였다.

옥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정문에서 차례로 문··강당·사당 등이 직선을 이루고 있다. 역락문에서 체인묘까지는 크게 4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심에 강학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낮은 단부터 진입 · 강학 · 제향공간으로 1개의 축에 놓여 있어 상··하의 위계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며, 제일 높은 곳은 사당을 배치함으로써 성현에 대한 존숭과 외경심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건물 배치는 성리학의 근본 개념인 '()'의 공간이 위계적 질서 체계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회재 선생과 옥산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