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학교

발제문

청풍헌 2024. 5. 3. 14:49

한국중세사(20240312)

발표자: 김 용 재

高麗 초기의 三國史編撰에 대한 一考

鄭求福

. 머리말

학계에서 통칭되는 구삼국사의 정식명칭은 三國史였다. 비록 이 책은 현전하지 않지만 사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이 책은 三國史記三國遣事를 편찬함에 있어서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이 책의 편찬시기, 편찬목적, 사서의 성격 등은 사학사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내용이다.

三國史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末松保和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大覺國師文集17에서 海東三國史라는 기록과 李奎報東國李相國集3東明王篇 서문에 舊三國史라는 기록이 있으며, 三國遺事5에서 前三國史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이들에 보이는 三國史라는 세 책은 하나의 같은 책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어서 田中俊明三國史의 유일한 현존기록인 東明王篇의 자료와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의 관련 기록을 비교하여삼국사기의 동명왕 기록은 三國史東明王本紀의 자료를 이용하였음을 밝히고, 삼국사기지리지4三國有名未詳地名에서 보이는 本國古記삼국사로 추정 하였다. 또한 三國史는 본기와 열전을 갖춘 기전체의 역사서로 추정하였다.

북한의 김석형은 그 책의 원명칭이 삼국사라는 것을 밝혔으나 구분을 위하여 구삼국사로 표기하였고, 三國史記11, 41에 언급된 본기는 三國史의 본기를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三國史本紀列傳, 도 갖춘 史書로 추론하였다.

이어서 강인숙은 帝王韻紀에 보이는 檀君本紀를 들어 이는 삼국사에 실렸었다고 주장하여 삼국사에서는 단군 이래의 역사가 서술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국사의 내용이 삼국사로부터 인용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洪潤植삼국사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었는데 국사와 삼국사로 인용된 자료를 삼국사기와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실증적으로 밝힌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李康來삼국사기에 인용된 구삼국사론을 부정하면서 지금까지 모든 연구결과에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삼국사또는 국사삼국사기를 지칭한다고 파악하였다.

 

. 三國史記三國史關係

金富軾은 인종 23(1145) 12壬戌(22)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왕에게 바칠 때에 進三國史表를 써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三國史에 대한 언급을 직접 하지 않고 古記라고 汎稱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말한 古記三國史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분명하다.

현전하는 유일한 三國史의 자료인 李奎報東國李相國集에 전하는 東明王篇의 기록과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의 동명성왕 신화를 대조하여 보면 삼국사기에서는 魏收魏書를 주로 인용하였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 삼국사의 자료 이외에 새로이 보완한 자료로서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司馬光이 편찬한 資治通鑑의 자료를 새로이 이용하였다.

둘째, 삼국사기열전 중 張保臯·鄭年 傳은 당나라 杜牧의 문집인 樊川集張保臯·鄭年 傳을 그대로 轉載하였다.

셋째, 현재 삼국사기에 전거를 대어 의 형식으로 붙인 것은 삼국사기편찬시에 붙였다고 생각한다.

넷째, 의 서문 중 김부식이 써 넣은 흔적이 분명히 보이고 있다.

다섯째, 사론의 대부분은 김부식이 썼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본기 중 신라 경덕왕 152월 조의 말미는 김부식이 보충하였다.

일곱째, 이 밖에 기록 중 이때에 비롯된 것이라는 표현은 김부식이 써 넣었다고 판단된다.

위에서 살핀 바는 삼국사기三國史와 대조하지 않고서도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 추가하여 써 넣었다고 판단되는 자료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중요한 원전은 三國史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중요한 이유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위하여 자료를 널리 구한 노력이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문하시중에서 물러난 후 34년 사이에 편찬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사료를 새로이 발굴해 내는 일은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많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 三國遺事에 인용된 國史三國史

삼국유사국사로부터 인용된 사료가 있다. 국사라는 말은 중국에서 각 왕의 실록이 편찬되고 그 왕조가 멸망하면 다음 왕조에서 실록과 기타 자료를 모아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을 보통 국사라고 칭하였다.

三國遺事國史19, ‘삼국사10, 삼국사기가 한번, ‘三國本史1번 인용되어 있다. 洪潤植田中俊明 및 강인숙은 삼국유사國史로 인용된 기사의 내용을 삼국사기와 비교하여 다른 점을 밝혀 이는 三國史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李康來는 비록 다른 내용이 전하지만 이것은 일연이 다른 자료로부터 보충하였다고 보고, 이는 삼국사기를 지칭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국사로 인용된 사서에는 삼국사기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기사가 있다.三國遺事에는 국사를 이용하여 쓴 기사의 내용이 비록 단편적이지만 三國史記와 다를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한 점, 동명성왕을 동명제 내지 동명성제로 표기한 점, 연대를 제 몇대왕 즉위 몇년, 간지로 표기한 점등은 이책의 특성이다. 이런 점은 三國史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완전히 이질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국사의 내용이 三國史記와 다르다는 점만을 주장하고 이를 무조건 三國史로 보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국사라는 책은 분명히 三國史와는 별개의 책이라 생각한다. 國史가 혹 충렬왕 12(1286)直史館 吳良遇 등이 원나라에 바치기 위하여 편찬한 국사가 아닐런지 추정하여 본다.

다음으로 三國遺事에 인용된 삼국사에 대하여 살펴보자. 前三國史舊三國史, 海東三國史는 같은 책이라는데는 이의가 없다. 삼국유사에서 삼국사가 인용된 자료는 10항목이 보인다. 그 중 하나는 紀異2 武王 條武王……國史云王興寺眞平王遣百工助之……三國史云 是法王之子……로 기록되어 있어 한 문장 내에 두 책을 함께 병렬적으로 인용한 점에서 국사와 삼국사는 서로 다른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 三國史編撰 體裁敍述方式

고려 초에 편찬된 三國史의 서술체재는 紀傳體로 편찬된 최초의 사서임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본기가 설정되었음은 동명왕으로부터 확인되며, 열전이 설정되었음은 貴山열전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리고 가 설정되었음은 강인숙의 논문에서 제기되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삼국사와는 다른 國史라는 紀傳體로 쓰인 책이 삼국사기이후에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고, 단군기는 國史로 인용된 고구려 주몽의 서술에 보이고 있다. 삼국사는 삼국의 개국으로부터 서술하여 신라가 고려에 통합될 때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다고 판단된다.

삼국의 본기 중 高句麗 本紀를 제일 앞에 서술하였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역사를 高麗本記로 기록한것은 고구려 후기 국호를 사용한 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는 고려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왕조에 대한 역사적 자긍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의미가 있었다고 이해된다.

다음으로 신라본기를 백제본기 앞에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고려 초에 후백제는 적대세력으로 전쟁으로 격파시켰으며, 신라는 고려태조가 친선책을 썼고, 또 나라를 귀부 받은 점으로 미루어 신라에 대한 감정은 적대적이 아니라 우호친선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 三國史編撰時期

삼국사의 편찬 관련 기사는 고려사고려사절요등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사가 편찬된 하한을 고려사의 기록을 검토하여 末松保和는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타고 史館에 보관되어 있던 사료가 불타버린 1010년 이전으로 파악하였다.

고려초기의 실록은 7代事跡이라는 이름으로 태조로부터 7穆宗 때까지의 실록이 政堂文學 修國史이었던 黃周亮 등에 의하여 36권으로 편찬되었다. 이를 편찬하기 전에 현종 2(1011) 정월 초하루날 거란이 침략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화재로 인하여 종묘, 궁궐과 민가가 크게 불탔다. 황주량은 궁궐이 불타 서적이 모두 재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이는 7대왕의 정치에 대한 기록의 소실이었다.

현전하는 이 시기의 고려사 자료는 특히 광종(재위 950975)의 기록이 더욱 부실하다. 개혁정치를 실시한 광종 때의 인물로 현존하는 금석문 자료를 통하여 史館監修國史를 지낸 金廷彥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광종 9(958)翰林學士를 맡아 경종 3년까지 계속 수행하였던 것 같다. 광종의 시기는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국초이며, 정치적·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진 시기임으로 三國史는 광종 때에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며, 이런 가정이 옳다면 그 책임자는 金廷彥이었다고 생각한다.

 

. 맺음말

이상에서 검토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사기는 고려 초에 편찬된 三國史를 기초로 하여 중국 문헌을 보다 많이 보완하여 직관지, 제사, , 색복 등을 고구려와 백제 자료를 갖추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 근본자료는 삼국사였다고 생각한다.

둘째, 삼국유사에 인용된 국사삼국사를 기존연구에서는 동일한 삼국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인용된 내용을 면밀히 검토, 분석한 결과 이들은 다른 별개의 사서 임을 밝혔다.

셋째, 三國史紀傳體의 역사서로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태조에 의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으며, 도 설정되었으나 신라측 자료가 상세한 반면 고구려와 백제측 자료가 부족하여 삼국의 균형된 서술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맨 앞에 高麗本紀라 하여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신라사를 다음에 서술하였다고 이해된다.

넷째, 三國史의 편찬은 광종년간 사관이 설치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유추하였다. 三國史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덧붙인다면 학계에서 이를 설화중심의 역사서나 神異 중심적 사서로 파악한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三國史에서 이미 기록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점이라든지 역사를 국가의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한 점, 기전체로 서술한 점에서 중세 사학의 출발이 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 > 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광사  (0) 2024.07.31
강의  (0) 2024.06.04
나는 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닌다  (0) 2024.04.29
학교  (0) 2024.03.20
인문학관  (0) 2024.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