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난중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 기획전시에서 진본을 친견하다

청풍헌 2013. 12. 15. 21:43

난중일기가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제 되었다.

기록의 달인인 우리네 선조들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이 난중일기가 유네스코에 등록 됨으로 유네스코의 여러 관리 규정을 따라야 한다.

이후 모사본만 전시를 하고 진품은 수장고에 깊숙히 들어가 향후 100년간은 일반인 들이 친견 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 현충사로 향했다.

 

지난 통영별로를 걸을때 천안에서 김치연 박사님의 추천으로 현충사를 참배 할려고 했으나 여건이 어려워 참배를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껏 미뤄오다 좋은 기회가 되어 통영향토사 답사팀에 동참하게 되었다.

중부지방의 폭설 예보가 있었다고 하는데 통영사람들 그 의미는 별로였다.

오히려 눈이오면 마냥 즐거울 것이다.

 

덕유산 휴게소에 많은 눈이 내렸다.

눈발이 내리는날 아이같은 심정으로 마냥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동했다.

현충사에 도착하니 눈이 더욱 내린다.

준비해온 점심을 먹기 위하여 야외 휴게 밴치를 치우고 음식을 차렸다.

 

전날 밤새워 음식을 만든다고 수고한 향토사 회원들에게 고개가 숙여지는 정성 이었다.

어떤 분은 김밥을 처음 싼다고 했으며 밤새워 빼때기 죽을 끓여 오신분,호박죽을 맛있게 끓여 오신분도 있다.

통영의 음식은 정성이다.뽈래기와 마른 건어를 쪄왔으며 전어 밤젓도 있다.

눈이 휘날리는 야외 벤치에서 먹는 점심도 특별했다.

▲눈오는날 천진난만한 표정들

▲덕유산 휴게소에서 눈싸움도 하고

▲바닥에 통영을 쓰고 계신 소대장님(뼈속 깊숙히 통영스런 통영인들)

▲눈을 맞으며 통영밥상을 먹다.

▲통영밥상

 

현충사 전시관의 강의실에서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인 임원빈 박사가 안내를 했다.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의 삼도수군통제사님이 1달전 부터 주선을 하여 귀한 시간을 내어 주셨다.

임박사님은 해사 출신으로 해사에서 오래동안 교수로 재직하다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을 맡아

이순신을 재조명 하는데 앞장서고 계신분이다.

약 30여분간 강의가 있었다.

 

 

일반적인 국민들이 이순신을 알고있는 사항이 무협지의 관점에서 알고있는 수준이다.

즉 열세의 조선수군으로 대군의 왜구를 연전연승으로 물리친 영웅으로 묘사 되었다.

당시의 조선 수군은 왜의 수군에 비하여 절대 열세가 아니었다.

전투에 유리한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 전투에 임했다.

 

 

당시의 조선 수군들의 전투력은 바다 건너온 왜군의 전투력보다 월등 했으며

함선과 함포전술의 새로움으로 무장된 조선수군은 당시 최고의 수군이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순신 이라는 훌륭한 지휘관의 능력에 의하여 극대화 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NNL이다.

한산대첩은 그 위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전투였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이순신의 말처럼 호남을 지키기 위한 최후 보루인 이곳 한산도가 조선의 최후보루였다.

이곳을 지키기 위하여 임란후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열었다.

 

 

위대한 장군은 홀륭한 조력자에 의하여 더욱 빛난다.

그 조력자들은 권율, 이용, 이후백, 이광, 조현, 류성룡등 다수가 있다.

▲눈발이 날리는 현충사

▲이순신 전문가 임원빈 교수

▲통영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는 통영향토사모임

 

 

난중일기!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기록이다.

개인의 일기 형식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에 해군의 최고지휘관이 직접 매일 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 소회를 현장감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월 이후부터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7년 동안의 기간을 망라한다.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 등의 친필본 7책이다.

 

현존하는 이충무공 난중일기에 관한 기록물은 다음과 같다.

1.난중일기 초고본(원본),

2.충무공유사(후대 1693년이후 38쪽)

3.충무공가승(1716년 숙종42)

4.이충무공전서(1795 정조19년)

5.난중일기초(1935 조선사편수회)

6.이충무공난중일기(1960년 이은상)

7.임진일기(2007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8.이순신 일기초(2007박해일 서울대교수)

그외 영문 번역본과 다수의 출판물이 있다.

 

난중일기라는 명칭은 원본에는 임진일기,계사일기 등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충무공전서를 발행하며 난중일기라는 명칭을써 지금까지 난중일기로 통하고있다.

▲전면

▲임진일기 표지

▲임진일기

▲초고본 내용

▲진품 초고본 일기

 

 

▲일필휘지의 초서체로 쓰여진 진본

▲신구이순신차초

이순신이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삭탈관직 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있을 때 이순신을 구명하고자 약포 정탁이 올린 ‘신구이순신차초(申救李舜臣箚草)’는 절절하기만 하다.

‘당초에 일본군의 배가 바다를 건너와 적의 기세가 하늘에 넘칠 때 수령들은 성을 버린 자가 많았고, 장수들은 군사를 온전히 한 자가 적었습니다. 조정의 명령이 어찌 사방에 미쳤겠습니까.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원균과 더불어 흉악한 예봉을 꺾자 국내의 인심이 조금 살 뜻이 있었으며, 창의한 의병들은 기세를 북돋고 적에게 항복한 자는 마음을 돌렸으니 그 공이 거만이 됩니다. 조정에서도 가상히 여겨 품계를 높이고 통제사의 호를 내려줬습니다. … 바라옵건대 은혜를 내려주시어 형벌을 면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공을 세우도록 하게 하시면 감격해 성은을 받들기를 천지와 부모와 같이 할 터이니 스스로 목숨을 바쳐 보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초본

 

 

▲정조가 발행한 이충무공전서

▲충무공유사

 

▲충무공 문중에서 소장중인 거북선 그림

 

▲임진장초의 당포파왜병장 부분

 

 

이 책은 임진왜란(1592∼1598) 때에 이순신(1545∼1598)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연도별로 7권이다.
이순신은 28살되던 해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불행하게도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실격하였고, 4년 뒤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벼슬을 시작했다.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詩)를 짓는데도 특출하였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곧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진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극한 충성심과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일기의 구성을 보면 제1권은『임진일기』로 선조 25년(1592) 5월 1일부터 선조 26년(1593) 3월까지 27매, 제2권은『계사일기』로 선조 26년(1593)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30매, 제3권은『갑오일기』로 선조 27년(1594)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52매, 제4권은『병신일기』로 선조 29년(1596)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1매, 제5권은『정유일기』로 선조 30년(1597)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27매, 제6권은『정유일기속』으로 선조 30년(1597) 8월 4일부터 선조 31년(1598) 1월 4일까지 20매이나 약간의 중복된 부분이 있다. 제7권은『무술일기』로 선조 31년(1592)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8매로 구성되어 있다. 7년의 난 동안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쓴 것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39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이것은『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내용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

 

 

2013.12.11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