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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남해 이순신 祠堂 史料 조사

청풍헌 2021. 7. 30. 22:33

여수, 남해 이순신 사당 자료조사

흔히 충무공 이순신의 3대 사당으로 여수 충민사와 통영 충렬사, 남해 충렬사를 꼽는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이 있는 사당을 비교·분석하기 위하여 여수와 남해를 방문했다.

여수 충민사는 이순신 장군이 머물던 전라좌수영의 공식 사당이다. 최초의 사액 사당으로 위상을 갖고 있으나 대원군 서원 철폐 때 훼철된 후 일제 강점기에 복설 되었다가 다시 훼철되는 아픔을 겪었다. 충민사는 사적 381호로 주벽에 충무공 이순신을 좌우에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흥국을 모신 사당이다. 1600년도에 사당을 세우고 1601년에 충민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8년 사당이 훼철 되면서 당시의 문서는 향교로 옮겼다고 하는데 알 수 없다.

충민사는 춘추로 석채례를 지내는데 향교에서 주관하며 사단법인 여수지구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이사장을 알게 되어 연락했다.

여수향교는 시내에 있으며 여수 바다가 훤히 내려 보이는 곳에 있었다. 향교의 전교님과 함께 인사를 드리고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충민사에도 심원록(尋院錄)이나 방명록(芳名錄), 혹은 다른 이름으로 집사록(執事錄)이 있는지 확인하니 시도록(時到錄)과 중기(重紀), 사지(祠誌)를 보여주셨다. 심원록(尋院錄)은 시도록(時到錄)이며 헌성금을 적은 중기(重紀)가 있고 후대에 만든 충민사지(忠愍祠誌)가 있었다. 여수 향교는 사람이 기거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여러 활동을 하시는 것 같았다. 제본을 위하여 1991년 개정 본을 한 권 빌려서 충민사로 향했다. 예상대로 충민사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남해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의 시신을 임시로 거치한 곳이며 매우 뜻있는 유적지다. 이곳도 1662년 사액을 받았으며 이듬해인 1663년에는 통영충렬사에도 사액을 받았다. 남해충렬사도 대원군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 기단만 남기고 위패를 묻었다. 나머지 여러 기록은 지방 유림이 회수했을 것이나 지금은 알 수 없다. 이곳 사단법인 남해충렬사 사무국장님과 연락되어 자료를 부탁했다. 역시 남해에도 조선 시대 자료는 없었다. 근대 자료도 없으며 1965년부터 자료가 있었다. 심원록(尋院錄)은 없으며 방명록(芳名錄)은 시도기(時到記), 집사록(執事錄)은 참안록(叅案錄)으로, 헌성금(獻誠金)은 예조록(禮助錄)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광주 고경명의 포충사, 여수 충민사, 남해 충렬사를 방문한 결과 통영충렬사의 심원록의 가치가 월등히 높았다. 이것을 어떻게 요리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이것이 나의 숙제다. 통영충렬사는 훼철이 되지 않은 원형을 유지하는 고유의 사당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적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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