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길문화연대

통영의 문화예술인을 찾아서

청풍헌 2021. 11. 15. 05:29

경상대 해양과학대 미래산업융합학과 학생들과 함께 투어를 했습니다.

윤이상 기념관과 국제음악당, 전혁림 미술관, 봄날의 책방을 투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했습니다.

 

통영의 문화예술인을 찾아서

통영길문화연대 대표 김용재

 

1.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1) 약력

산청-도천동-보통학교-일본-통영 화양학원-일본 유학-귀국-해방-통영문화협회-보육원-통영여자고등학교-부산사범학교-이수자와 결혼(국어 선생)-성북동-양정고등학교-대학 출강-파리 유학-서독 유학-다름슈타트 입선-방북(사신도)-도나우싱겐 음악제와 예악-납치 구금-징역 10년-구명연대-석방-뮌헨 올림픽 심청전-해외민주화(한민연)-김대중 석방 운동-대공로 훈장-범민족 통일음악회-방한 시도(김영삼)-처염상정(處染常淨)

 

2) 독일유학

윤이상은 마흔에 유럽 유학을 떠났다. 낯선 세계에 발 디딘 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 고전과 현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음악 기법을 한데 아우르는 경지를 독창적으로 창안해내는 데 주력했다. 윤이상은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세계에 윤이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윤이상은 동양의 음악을 서양 음악에 적용하고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다. 동양의 음계를 서양악기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완벽한 새로운 세계의 현대음악을 창시한 윤이상의 사상과 기조는 한국적 음악에 있다. 한국적 음계는 하나의 음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것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 그는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의 5대 작곡가’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3)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 중앙정보부는 ‘서유럽에 거주하는 예술가와 반정부지식인, 유학생 등 194명이 동백림(동베를린)주재 북한 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하면서 알려졌고 윤이상,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 등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한 사건이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 중 국제사회의 연대로 석방운동이 일어나 박정희 정권은 어쩔 수 없어 석방하였다.

이후 윤이상은 남한과 북한,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에 몸담아 온 특이한 존재였다. 뿌리와 과정이 다른 두 세계의 문화 사이에서 사유의 뜨락을 넓혀갔다. 빛깔과 무늬가 다른 동양과 서양의 음악 사이에서 창조의 고뇌를 끌어안은 장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4) 지상의 마지막 걸음

1994년 12월 하순 고향 바다를 보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현해탄을 건너 공해상에서 고향 통영 바다를 생각하며 가슴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랬다.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묘비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생전의 그는 “이데올로기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민족은 저 푸른 창공처럼 푸르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5) 거장의 귀환

윤이상 선생은 생전에 “유럽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한 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다”고 했다. 유럽으로 떠난 후 고향에 대한 기억이 더욱 강렬해져서 전통 음악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독일에 있던 선생의 묘소는 2018년 3월 30일 국제음악당 언덕으로 이장했다.

묘비명: 處染常淨(처염상정)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다.

 

2. ‘구십, 아직은 젊다’. 전혁림 화백

 

1) ‘색채의 마술사’ 전혁림

전혁림 화백은 1916년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 수산학교를 졸업하고 전공과는 다른 미술의 길을 택했다. 오로지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여 한국화단에 거목으로 우뚝 선 독보적인 인물이다. 고향에 은둔하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풍경을 노래해 왔다. 통영 앞바다의 색채를 주요 모티브로 삼아 독특한 화면구성과 색채사용으로 한 일가를 이룬 그를 화단에선 한국적 추상화의 시조로 평가한다. 통영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 바다의 화가로 불린다.

 

2) 만다라 이야기

만다라는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의 하나다. 새 만다라의 작품은 목기 작품의 결정판이다. 함지 그릇에서 시작된 목기 작품은 과자 그릇을 장안의 유명한 목수가 짜면서 100점, 200점, 300점을 넘기면서 위대한 예술품으로 탄생했다. 과자 그릇 하나하나도 작품이지만 그것을 한태 모아 놓으니 광활하고 무한한 세계가 펼쳐졌다. 이 작품은 가만히 바라보면 불교의 교리 같고 부처님을 모신 법당의 닫집 같고 작은 문양 하나하나가 경전 같다. 그것은 만다라였다. “끝이 없고 부처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며 경전이다. 그래서 새 만다라라는 이름을 짓고 연이어 붙여서 전시하여 거대한 벽면을 채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루었다. 이 작품은 천재적인 독창성과 보편성을 갖춘 역작이라 평했다.

 

3. 봄날의 책방

봄날의 출판사에서는 미술관 옆의 빈집에서 작은 동네 책방인 봄날의 책방을 열었다. 출판 기념회와 각종 강연이 이어져 문화 욕구를 충족시켰다. 작은 책방 하나가 봉수골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책방과 미술관 주위로 분위기 있는 카페가 들어서고 문학관이 생기고 맛 집이 생기는 등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멀리 타 시도에서 책방을 방문하고 차를 마시고 강의를 듣고 통영의 정을 느끼는 분위기 있는 곳으로 변했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문화를 팔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어느 마케터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사람들은 밥 한 끼 먹는 돈은 아깝지 않으면서 책값이 싸네 비싸네 한다.”면서 속상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농부가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과 품이 들 듯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하여 작가는 산고의 고통을 겪는다. 그 가치는 밥 한 그릇 값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봄날의 책방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은 책을 사주는 것이다. 책방의 방문 시 1인 1책이 기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