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충청수영성과 선유도

청풍헌 2022. 8. 28. 08:55

충청수영을 다녀와서
오랜만에 이배사의 답사가 있었다.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란 공부하는 단체인데 현장답사와 온 오프라인을 넘나들면서 공부와 우의를 다지는 전국적인 단체이다. 국내 이순신 학문에 관한 최고 권위자들이 포진한 단체이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웅크리고 있다가 드디어 충청수영과 명량해전 이후 작전상 후퇴한 고군산도(선유도)를 답사하였다.

충청수영은 현 오천항으로 처음 본 느낌은 한산도 통제영의 느낌을 받았다. 천혜의 항구로 지금은 매립이 되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천혜의 항구였다. 충청수영의 수군 편제는 13관(면천, 당진, 태안, 서산, 해미, 결성, 홍주, 보령, 남포, 비인, 서천, 한산, 임천) 7포(회이포, 소근포, 마량, 서천포, 안흥진, 파지도, 당진포)라 한다. 수영성 정상에 있는 영보정은 경관이 좋기로 이름난 정자다.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겼다. 정약용은 세상에서 호수, 바위, 정자, 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이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격찬했으며 명나라 장수들은 악양루보다 뛰어나 가히 천하의 절경이라 했다. 정자로서는 규모 및 경치가 으뜸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세병관 마루가 생각났음)

임란 초기 한성수복전에 참여한 충청 수군은 강화기에 경상도의 한산도에 주둔하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시행되므로 이순신 휘하의 지휘 통제 하에 놓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순신을 도운 충청 수군은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란기의 충청 수사는 정걸-구사직-이순신-이계정-선거이-최호(칠천량 해전에서 사망)로 이어졌다. 임진왜란기의 충청 수군은 일정한 임무를 수행했지만, 중심적인 역할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명량해전에 승리한 후 작전상 후퇴를 하였다(고군산도 12일). 이후 일본군은 연해안으로 올라오면서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체찰사 한응인의 장계와 강항(姜沆, 1567〜1618)의 『간양록(看羊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 정희득(鄭希得, 1575∼1640)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도 서해안 쪽 피해의 기록이 있다. 즉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남해안의 재해권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전라도의 무안 앞바다까지 진출하여 유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후에 왜 일본군이 후퇴했을까? 격군님은 시기적으로 겨울이라 해상활동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국내 사정에 기인한 바도 있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심님은 후퇴하면서 육지 쪽을 정탐하니 법성포에도 적들이 있어 사실 명량해전은 적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이순신은 바다를 통해 후퇴했다.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는 약탈하던 일본군이 강항을 포로로 잡아 심문 중에 '조선 수군은 안흥진에 있는데 그곳에 명나라 수군 10,000여 척이 있어 합류할 것이다' 라고 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일본군은 후퇴하여 순천 왜교성에 진을 구축했다.

얻은 것
1, 충청수영성의 위치적 확인, 영보정
2. 명량해전 이후 일본군의 동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