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책 이야기

서평 쓰기(중국과 조선, 그리고 중화)

청풍헌 2023. 9. 30. 16:01

서평 쓰기

논문을 끝내고 다음 목표를 정하지 않았다. 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하여 교수님에게 부탁하여 수업 교재를 소개 받아 구입하여 읽었다. 서평을 간략하게 쓰고자 한다.

필자 김영식은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화학물리학 박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자연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학위를 소유한 분이다. 서울대학교에서 36년간 교수로 재직 했으며 저서로는 주희의 자연 철학, 정약용의 문제들, 유가전통과 과학등이 있다.

한국사에서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사에서 중국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명제가 내가 공부한 의례의 근원을 따질 때 갖었던 의문이다. 의례와 양식, 행동의 근원은 중국으로 결국 귀착되어 과연 우리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이 이 부분을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중국과 조선, 그리고 중화

김영식(2019)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에서는 중국 인식의 전개, 2부는 중화 사상의 재조명, 3부는 구체적 사례들로 기술되어 있다. 각 장에 서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의 의도를 살펴보자.

먼저 제1부는 중국에 대한 조선 후기 사인들의 인식과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경향들, 그리고 그같은 경향들이 나타나고 변화하는 과정을 다루는 장들로 이루어진다.

1장에서 조선 후기 사인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지배한 중화사상도전을 불허하는 ()’인 중국의 ()’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 및 그 지배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관념이 바로 중화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 사상의 다양한 표현 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과 명 신종에게 제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이 있다. 이어지는 2~4장에서 중화사상이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몇 가지 경향들-대명의리, 청에 대한 부정적 태도, 주자 정통론의 심화 등-에 대해 다루었다.

2장의 대명의리에서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명에 대하여 재조지은이 힘을 받아 그 같은 정서가 확산되었다. 남명(南明), 명의 유민, 대통력서(大統曆書), 대보단으로 이어지는 관념으로 중화로서의 명에 대한 인식이 굳어졌다.

반면 3장의 청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대해서는 청은 오랑케로 종주국의 인정하지 않았으며 청의 예의와 풍속에 대해서도 부정적 평가 일색이었다. 조선 사인들은 청이 망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이렇게 청에 대한 부정적 인식하에서 주자 정통론의 심화가 일어났다.

4장에서 다룬 주자 정통론의 심화는 중화에 대한 그들의 존숭, 숭배의 대상이 명으로부터 중국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조선 사인들이 이상적인 시기로 생각했던 주()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존주론(尊周論)’이 펴졌다. 이런 배경 아래 주자 정통론에 천착하여 심화되었다. 주자 절대화를 지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주희는 조선 후기 사인들 사이에서 이상적인 전형으로 일종의 전범(典範)의 역할을 했다.

5장은 조선의 문화가 중화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소중화의식, 나아가 중국이 오랑케의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제 조선이 유일한 중화라는 조선중화의식에 대해 다루었다. 양성지는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기자,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의 일에 부지런하고 사대부는 문무가 내외의 일에 힘써서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어서, 별도의 세상(乾坤)을 이루고 소중화라 부르면서 3,900년이나 되었다고 말하면서 조선을 소중화라고 여겼다. 한 발 더 나이가 조선중화라는 개념도 생겼다. 시간이 가면서 중화인 명이 멸망하고 조선이 유일한 중화라는 생각이 나타났다. 오랑케가 나타나 중원을 차지하여 중화가 없어졌음으로 조선이 유일한 중화라는 것이다. 조선이 명을 계승 했다는 생각에 조선 국왕들은 대보단을 건립하고 재조지은을 따랐다.

6장에서 이같은 소중화, ‘조선중화사상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상과 이를 뒷받침한 기자(箕子)에 대한 믿음과 해석 등을 다루고, 이로부터 이어진 단군에 대한 관심, 그리고 고구려, 발해 및 고대 조선의 북방영토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았다. 많은 조선 사인들은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다는 기자 동래설을 믿었다. 기자가 조선만이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에 조선중화의식이 나타났다. 송시열은 우리 동국은 본래 기자의 나라다라고 언급했다. 이종휘는 우리나라가 기자 조선 후 오랑케로 전락했다가 조선 건국 이후 다시 중화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기자 조선 이전의 단군을 민족 시조로 보는 경향이 고려말, 조선 초에 나타났다. 조선 건국 직후 예조 전서 조박은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 사인들은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서는 그들이 웅거했던 북방영토에 대해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만주지역의 고토 회복 의식이 나타나기도 했다.

7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조선 후기 사인들의 조선인으로서의 자의식, 조선의 문화 및 학문에 대한 관심 및 자부심을 다루었다. 조선 후기 사인들은 자신들을 중화 문화와 일체화시키고 중화 문명을 자신들의 전통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한문(漢文)을 외국어가 아닌 조선의 문어(文語)로 보았다. 한편 사인들은 중국과의 문화에 대한 일체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같은 수준의 문화를 지닌 조선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자의식이 나타났다. 더 나이가 중국과는 별개의 독자적 구역인 조선의 언어, 풍속, 문화 등 여러면에서 중국과는 구별된다는 인식을 가졌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풍(朝鮮風)’이라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조선 사인들의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 같은 관심은 조선의 문헌과 서적을 수집 정리하는 작업들로 나타났다. 조선 문화의 독자성에 대한 자의식과 함께 조선 문화와 학문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이 자라났다. 그것은 조선의 동음(東音), 조선의 한자음이 고음(古音)에가깝다는 인식으로 나타났다. 동음을 표기한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8장은 청의 높은 문화수준을 인식하게 되면서 일부 조선 사인들 사이에 그것을 배우려는 북학사상이 출현하여 전개되는 과정을 살폈다. ‘이상화, ‘이념화된 중국인 명에 대한 의리, 그리고 명으로 상징되는 조선중화 의식이 퍼지는 일방, ‘현실로서 중국 청 치하의 옛 중화의 유풍을 배우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청에 대한 높은 문화 인식을 가졌으며 반대로 조선의 낙후된 문화를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청의 문화를 배우자는 북학의 사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북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높은 수준의 청 문화를 배우고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였다.

9장에서는 그 같은 상황에서 청 중심의 현실을 수용하는 경향이 퍼지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첫째 대명의리 정서와 반청 사조의 퇴조를 들 수 있다. 또한 청 지배 질서를 수용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청과 조선이 명운을 함께 한다는 청과의 일체감까지 생겨난 것이다. 이에 따라 1부는 결국 조선 후기 사인들의 중국 인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 사상사 전체의 재조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인들의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했으며 서로 모순이 되거나 마찰이 존재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제2부는 1부의 여러 장들에서 살펴본 이같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양상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중화 사상의 성격에 대해 재조명하는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10장은 문화로서의 중화와 중화관념의 상대화에 대하여 언급했다. ‘중화를 규정하는 지역, 종족, 문화의 세 가지 기준들 중에서 문화가 이같은 여러 경향과 사조들이 형성, 전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중화 관념이 상대화하는 경향이 출현함을 보인다. 중화를 규정하는 세가지 요소들 중 지역이나 종족이 아닌 ()’()’, ‘()’ 등 문화가 중심이 된다는 인식을 하였다. 이런 생각을 공유하면서 소중화조선중화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중화 문화의 여러 측면들 중 조선 사인들은 예의(禮義)와 의관(衣冠)을 그 핵심적 요소로 보았다. 이처럼 예와 문화를 통하여 중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조선 사인들은 반대로 예와 문화를 잃으면 이적(夷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중화와 이적 사이에 서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이 구분이 절대적, 고정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태도가 생겼다. 한편 서양의 지리 지식의 도입으로 인하여 중화가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11장은 중화 사상의 폭과 유연함으로 소중화, 조선중화 의식이나 조선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주적, 독자적 경향, 북학 사조 등 조선 후기 사인들의 중국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 다양한 경향과 사조들이 일견 중화 사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중화 사상에 긴장과 모순을 빚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들이 모두 중화 사상의 틀 안에서 일어난 것임을 보이고, 중화 사상이 이적 왕조 청이 중원을 지배하고 서양문물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화이론의 다양한 측면들과 그것들 사이의 모순과 긴장이 빚어내는 화이 구분의 균열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하고 폭넓은 틀이었음을 보인다. 계승범은 문화적 자부심의 본질은 중화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부심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중화와 연결을 지음으로서 생긴 자부심이었으며, 조선의 문명을 중화에 귀속시킴으로써 발생한 자부심이라 말했다. 조선의 독창성은 중화 사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중화 사상의 틀 안에서 중국을 본받으려고 하고 중국과 같은 중화의 수준에 이르려는 욕구가 강했다. 청의 중화 문화가 높은 수준에 이룬 것을 인정하는 북학론이 일어났다. 북학론에 깔려 있는 용하변이의 관념은 중화와 이적이 절대불변의 것이 아닌 서로 변할 수 있다는 개념이었다. 이적 왕조인 청은 어디까지나 이고 조선은 명과 함께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의 높은 문화 수준은 화-이 양분법에 긴장과 혼돈을 가져왔다. 이런 긴장 상황이 조선중화관념과 북학이 태어났다.

 

3부는 구체적 사례들로 조선 후기 사인들의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다양한 측면을 다른 각도들에서 다시 조망해볼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 주제를 다룬다.

먼저 12장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중심인 중국과 주변부조선이라는 관점에서 봄으로써 앞에서 논의의 전제이자 배경으로 깔려 있던 중화 사상이라는 동아시아의 특수한 관점에서 벗어나서 이를 더 일반화시켜보려고 시도하는데, 특히 주변부 조선의 사인들이 중심부 중국 학계와 사인들에 대해 지닌 태도를 살펴보았다. 중심부는 과연 어디인가? 시대별로 위치별로 다를 수 있다. 중심부와 주변부에 대한 관점은 한국 사학자와 한국학 학자들 사이에 조선을 중국에 대해 종속적으로 보는 사대적 관점이라 거부감을 지닌다. 그런 연장에서 한국의 독창성에 주목하여 탐구가 이루어지도 했다. 조선의 문화와 학문에 대한 중국 사인들은 거의 무시하고 무관심으로 보여주었다. 일부 시문 분야에서 조선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시문 외에 허준의 동의보감이 판각(板刻)되고 널리 유통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유통 되거나 간행된 조선의 저술들은 큰 관심을 갖거나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 사인들과 중국 사인들과의 교류의 폭이 좁았던 것에서 기인한 면이 있다. 그래도 연행 시 중국 사인들과의 교류도 있었다. 김상헌과 증손 김창업, 현손 김익겸과 김일진이 대를 이어 교류했으며, 홍대용도 대를 이어 교류했다. 조선 사인들의 시문이 중국에서 인정을 받기 위하여 사행 시 교류를 했다. 사실 중국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였다.

13장은 조선이 서양 과학을 도입함에 있어 중국에 의존하는 모습, 그리고 서학중국기원론에 대한 조선 사인들의 태도를 다루었다. 조선이 서양 과학을 도입하는데 있어 중국에 의존하여 중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도입하였다. 조선의 사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도입하는 서양 과학이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학중원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천문, 수학, 의약, 지리 등 과학 뿐 아니라 유교 경전, 역사, 제도, (), 술수 등 다른 모든 분야에서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서적에 크게 의존했다. 이후에 중국에서 서양 서적이 소화되고 재 구성된 채로 받아들여졌다. 시헌력(時憲曆)은 대통력(大統曆)의 틀 속에 담긴 서양 천문학 지식이다. 중국 사인들 사이에는 고대 성인들의 시기가 중국의 문명의 황금기였고, 성인들이 쓴 경전들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같은 믿음은 세상에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중국에서 기원했고 경전에 담겨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낳았다. 결국 서양 과학도 중국의 과학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서학중원론(西學中原論)’이다. 조선의 사인들도 자연스럽게 서학중원론을 받아들였다. 서학중원론에 대한 다양한 태도가 나타났다. 수용, 거부, 이용 등 다양한 방식을 이용했다.

14장은 중국에서 발생했거나 유행한 특정한 사조나 문화 요소가 조선에서 나타나는 시간상의 지연, 그리고 그 같은 시간지연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국 원형(原形)의 변형, 왜곡 등에 대해서 주자학, 서양 과학과 우주론, 천주교 등이 조선에 도입되는 과정 등을 예로 들어 살펴보았다. 주자학은 고려 시기에 들어와 조선조 이황(李滉)에 이르러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조선 사인들이 주희 사상을 완전 이해하지 못하여 다른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시간지연으로 인한 주희의 본래 생각과 다른 변형된 또는 왜곡이 있었음을 말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이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 등 몇 가지 철학적 논제들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서양 과학과 우주론에 대해선 시헌력을 청이 채택하자 즉시 조선에서 이를 채택하기 위한 논의와 검토가 있었다. 그러나 청이 역의 계산법을 공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10년 후에 시헌력(時憲曆)을 바탕으로 조선의 역서를 반포했다. 서양 과학과 우주론은 중국에서도 시간지연이 되면서 이해하는데 오래걸렸는데 조선은 60, 70년이 지난 정조대 말년에 이를 소화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명말에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사들의 활동과 저술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전래되었다. 조선 사인들이 천주교 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쯤 중국에서는 전례논쟁(典禮論爭)을 거친 후 사인들 간에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처럼 종국과 조선 사인들 사이에는 현저한 시간지연이 발생했다. 시간지연의 사례는 중국에 비해 조선이 낙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 조선의 차별성, 조선의 중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사례에서 보여주는 것은 조선인들이 중국의어떤 문화적 요소나 경향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환경에 적절히 변화시킨 후에 받아들였다.

마지막 15장에서는 중화질서의 틀 안에서 나타나는 조선의 자주적, 독자적 움직임의 한 예로 조선의 역 계산과 역서 간행작업을 살펴보고 그것이 흔히 거론되듯이 독자적 역(), 자국력(自國曆)’을 지향하는 움직임이었는지를 재검토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전 시기를 통해 계속해서 대통력, 시헌력 등 중국의 역법을 받아들이고 그에 바탕한 역서를 사용했다. 조선의 역서가 중국의 역법과 다른 것은 조선 자체의 독자적인 역법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역법 체계하에서 조선에서 별도로 제작해서 사용한 역서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역과 청 역의 차이는 위도가 다름에 있으며 굳이 조선 역을 계산한 것은 하늘의 운행을 반영하는 자체적 역 계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서 조선 나름의 역 만드는 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일환으로 조선의 절기 시각을 바탕으로 윤달을 추정해보기도 하고 행성운행표계산법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천상을 관찰하여 백성들에게 바른 시간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유가의 관상수시(觀象授時)의 이념에 따른 것이다. 독자적인 역법의 제정은 세종 때 칠정산(七政算)을 기원으로 여긴다. 칠정산도 결국 세종대의 역법 관련 작업은 중국의 역서와의 일치를 추구하며 진행되었던 것이고 조공책봉 관계로 인해 조선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역법을 개발하거나 채용할 수 없었다. 중국과 같은 역서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역사서 편찬, 주자학 체계 수립 등의 노력에서 보듯이 문화와 학문의 모든 영역에서 중국과 같은 수준의 성취를 꾀했다. 이 같은 추구들은 조선이 모든 분야, 모든 차원에서 중국과 같은 수준에 달하여 참 중화가 되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이는 결국은 중국을 기준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중화 사상-의 한 양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본문)

 

이 책에서 조선 후기 사인들이 중국에 대해 지녔던 다양한 인식과 태도,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같은 다양한 인식과 태도가 때로는 서로 모순되고 마찰을 빚기도 하는 등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었음을 보았다. 사실 중국을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것은 조선 후기 사인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고 그들이 많은 구체적인 일들에 접하고 대처하는 데 있어 중국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태도가 반영되고 영향을 미쳤다. 그 같은 구체적 사례들로 이 책의 3부에서 조선 사인들의 중국 사인들과의 관계, 서양 과학의 도입, 중국으로부터의 문화 요소들의 전래에 있어서의 시간지연, 조선 역서의 제작과 간행등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각각의 정치, 외교, 경제, 종교 등의 여러 측면들이 복잡하게 개입되어 영향을 미쳤고, 그 과정에서 조선 사인들의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물론 그 외의 무수히 많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그들이 지녔던 인식과 태도의 다양함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사인들 모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점은 그들이 대체로 중국 중심의 중화 체제를 인정하고 자신들이 중화의 전통을 계승한 중화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조선이 중화 문화의 역사적, 현실적 중심인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인 동국(東國)’이나 해동(海東)’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지 않았고 중심 중국의 문화적, 학문적 상황을 항상 의식했지만, 그들의 이상은 참된 중화였다. 그리고 그 같은 이상이 대전제로 깔려 있었기에, 이 책에서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태도의 다양한 모습들을 논의하면서 다른 여러 경향들이 때로는 중원의 중화와 주변의 이적의 구분에 바탕한 중화 사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모순을 빚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중화 사상을 벗어나지 않고 그 틀 안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조선 후기 사인들의 다양한 중국 인식이 중화 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때로 중국 중심의 중화 사상이 독자적 자주국가로 벗어나야 할 사대종속의 사상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이는 중화 사상의 틀 속에서 발현될 수 있는 지적 활기와 다양성, 역동성을 무시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물론 정치적, 외교적인 측면에서 중화 사상이 그 같은 종속적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화 사상에 대한 이 같은 부정적 인식이 받아들여진 것은 근본적으로 전통 시기 조선 사인들이 널리 공유하던 생각을 오늘날 같은 다국가 체제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문화를 숭상하고 그것을 본받으려 하고 그에 종속되려 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오인한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인들이 중화를 존숭하고 그에 기꺼이 복속한 것은 중국이라는 국가, 정권에 대한 복속이 아니라 중화 문화, 중화 체제에 대한 복속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그 같은 복속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수치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이를 당연하고 심지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상황이었다. 다만 그들은 청의 경우에 대해서는 중화 국가가 아니었고 정당한 복속의 대상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그에 대한 복속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수치심을 느꼈고, 그 대신 정당한 복속의 대상으로 이미 멸망한 명을 중화 국가로 이상화시켜서 그에 관념적으로 복속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조선 후기 사인에게 중화란 국가의 현실 정권이 아니라 이상적 보편문화, ‘보편가치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조선이 중화를 존숭하고 그것에 도달하고자 염원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적 보편 문화에 비해 부족한,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는 이적(夷狄)이었고 이적의 상태에서 벗어나 중화를 지향하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에 존재했던 중화 문화그것이 실재했건 않았건를 준숭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오늘날의 다국가 체제하에서도 어느 특정 국가의 문화가 아닌 세계 보편의 문화, 가치에 대한 존숭이나 본받기는 널리 퍼져 있고, 그 같은 존숭, 본받기는 전혀 종속으로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그와는 반대되는 예들북한의 주체 사상이나 이슬람 특수주의, 유대 지상주의 등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신앙하고 성경과 예수를 숭배하는 것은 그들에게 보편적인 기독교 문화, 기독교 경전에 대한 존경, 숭배이지, 그것들이 유래한 유대 국가나 유대 문화에 대한 종속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다. 또한 이슬람 국가에서도 코란이나 메카에 대한 경배를 특정 국가, 지역에 대한 종속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기독교, 이슬람 등이 그것들이 기원한 특정지역, 종족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 포괄성, 유연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사인들이 중화 사상을 받아들인 것도 중화 문화가 지닌 그 같은 보편성, 포괄성, 유연성을 기반으로 했던 것이고, 실제로 중화 사상은 여러 다양한 태도를 포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폭넓고 유연했음을 앞장에서 보았다.

반면에 이 책에서 조선의 독자적, 독창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소홀이 되었을 텐데, 이에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 연구가 주로 한국에서 독특한 독자적인 것만 찾으면서 좋은 점만, 긍정적, 발전적인 점만을 찾는데 치중한 면이 있는데, 이를 지적하고 그 같은 편중을 시정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의 과정에서 반대편으로 치우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역사에서 좋은 점과 독특한 점만을 주로 보고 부정적인 것은 외면하려고 하는 것은 제대로의 역사 이행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흔히 한국사의 독특한 특성들로 드는 당쟁(黨爭), 노비(奴婢)제 등의 예들도 그것들이 한국사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준다고 하여 외면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요소들이 한국사에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났던 것임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대해서도 연구함으로써 그것들이 한국 사회와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들의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조선 후기 사인들의 중국과 중화 문화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살펴본 이 책이 그 같은 균형잡힌 시각의 연구가 자리 잡히는데도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이와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조선에서 중국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 경우에 접해서 성급하게 조선의 자주성’, ‘주체성이나 중화 사상으로부터의 탈피 등을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세종대에 자주 드러난 조선과 중국에 대한 풍토부동(風土不同)’에 대한 인식도 조선의 독자성, 자주성의 방향으로 진전된 것이 아니라 풍토부동을 중화 문화의 구현에 대한 제약 요건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해서 중국과 같은 문화 수준을 이루어내려는 생각에서 표명되었다는 문중양의 지적은 그런 점에서 수긍할 만하다. 또한 이렇듯 중국을 철저히 본받아 중국의 수준에 달하려는 노력을 반드시 사대적이라거나 종속적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이는 당시 절대적 대전제로 받이들여졌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질서와 중화 사상의 틀 안에서 조선이 최고 수준을 이루겠다는 적극적인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공유하는 현대 문화와 학문의 여러 영역들에서 최고의 수준, 이른바 국제적수준을 지향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위에서 본 정조 시기의 여러 시도들은 당시 중화문화권 안에서 최고 수준을 지향하는, 조선으로서 당연히 지닐 만한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다룬 역법의 경우를 보아도, 중국 역법의 틀 안에 머물며 중국 수준의 역사를 목표로 했던 정조 시기 역 계산과 역서 간행 작업은 오늘날 서양에서 기원한 달력, 서력 기원, 그리니치(Greenwich) 기준의 경도(經度) 체계와 표준시(標準時) 등으로 이루어진 틀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는 일이 당연시 되듯이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는 조선 사인들이 중국과 중화 문화에 대해 지닌 인식과 태도의 복잡함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해보려는 시도의 하나로 중국이 중심이고 조선은 주변부인 중심-부변부의 시각을 제시하고 중국의 기물, 관념, 사조 등이 조선에 전래되는데 있어서의 시간지연, 그리고 그 같은 시간지연에 수반되는 중국 원형의 변형, 왜곡에 대해 논의했다. 물론 이외의 다른 시각들에서의 새로운 조망이 가능할 것이다.

 

202393012:00 황용 청풍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