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향토사 수업)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통영항일운동 사적지를 고증하여 그 뜻을 기리는 것이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청풍헌 2015. 6. 6. 23:35

통영 항일 사적지 순례

201291일 일본군 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에서 주최한 통영항일운동 역사길 다가가기에 참여했다. 당시의 감흥(感興)을 고스란히 기록하여 블로그에 올렸다. 원장님께서 보시고 잘못 알려진 것이 있다며 한번 정리를 한다고 하셨다. 역사는 진실이 중요하며 사실 관계의 근거가 명확하여야 한다. 원장님께서 통영항일운동 사적지 찾기를 문화원 사업으로 하시어 모든 자료를 검토, 채록(採錄)하여 오늘 탐방을 나서게 되었다. 회사에서 자주 외출을 하여 미안한 감도 있지만 선의(善意)의 거짓말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조언을 듣고 외출을 했다. 문화원에서 첫 말씀은 인물을 다룰 적에는 조심해야 한다. 누가 친일이고 항일인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변성(可變性)이 존재함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한 어떤 사실을 기록하고 보도할 때 인용처를 밝힐 것을 부탁했다.

 

통영청년단회관에 대하여 강의가 시작 되었다. 통영 청년단 회관은 19193.1만세운동직후 통영청년단을 조직하여 회관을 짓기 위하여 노력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영재가 밭 254평을, 임철규 단장이 사재를 희사하여 19231118일 완공 하였다. 임철규 단장은 회관 건립을 위하여 문중의 재산을 처분하여 자금을 마련하였으나 말년에 여러 사업의 실패로 장좌도에서 자결함으로서 불운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청년단회관은 봉래극장과 더불어 항일 계몽운동을 하던 장소이다. 브나로드운동(연극, 그림으로 하는 계몽운동)을 했으며 그 운동은 문맹자들을 위한 그림이나 연극을 통하여 민중들을 계몽 시키던 운동이다. 당시 지육부(智育部)와 체육부(體育部)를 두어 활발한 활동으로 문학과 체육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이 배출 되었다. 체육은 축구와 씨름, 수영이 유명 했으나 1932년 일제에 의하여 청년단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등록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문고개를 오르면 호주선교사 집터가 보인다. 이곳에 진명유치원이 있었는데 유치원의 보모 문복숙과 김순이가 통영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부산감옥에서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9일경에 체포된 독립운동 동지들을 대신하여 313일 진명유치원 보모들의 만세운동이 있은 후 18일은 또다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성철, 봉철 형제가 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해산된 후 저녁 9시경 배재중학생인 박상건이 주도한 관란재 학동(學童)들을 대동하고 아적재자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과거의 서당은 조그만 건물이지만 전래(傳來)의 이야기로는 학구터라고 했다. 그 학구터가 있던 곳이 서당의 자리이다. 박상건은 다시 42일 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체포되어 6개월 옥살이를 했다. 관란재는 가죽고랑길 34-9 인근이다. 관란재를 내려오면 옛길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아적재자로써 아적재자는 아침장의 사투리로 큰개, 작은개, 우륵개에서 넘어오는 사람과 미륵도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으로 아침장이 열리는 곳이다. 가죽고랑을 건너는 조그만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기점으로 동드레, 서드레라 칭했다.

 

선창가를 지나 옛 충무도서를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오르는 길에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길야정의 예기조합터라고 한다. 예기조합은 과거 통제영 시절 기생청에서 유래한다. 통제영이 혁파되고 뿔뿔이 흩어진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조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예기(藝妓)조합이며 일명 권번(券番)이라고 한다.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김삼환 통영문화원발행 P64에는 정홍주(막래)와 이국희(소선)42일 오전 10시 길야정 예기조합에서 다른 동료 5명을 불러 모아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여 기생단을 조직 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름/별명 정막래(丁莫來) 당시나이 21

본적/주소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조일정 

판결기관 부산지방법원통영지청

죄명 보안법위반 

생산년도 1919

주문 징역 6 

관리번호 CJA0002201

판결날짜 1919.04.18 

M/F번호 00950375

사건개요:기생단을 조직하여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장핀과 초혜를 사서 같은 복장을하고 기생 조합소에서 부도정시장으로 나와 선두에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하였다.

(국가 기록원 독립운동 판결문)

 

길을 건너면 맛나꿀빵과 똥보할매김밥 사이가 해안선의 경계다. 병선마당에서 설명이 이어졌다. 통영에서 최초의 항일운동이 이곳 부도정 시장 매립지에서 일어났다. 1907년 일제는 벌써 남해안을 점령하고 통영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를 한다. 매립허가를 받고 공사 중에 일본 노가다 십장이 통영의 진사 집안의 친척인 염씨를 폭행하여 소요가 일어났다. 일본인들에게는 쌀도 팔지 말라는 말과 함께 생명의 위험을 느낀 일본인등은 인근에 주둔하던 거제 송진포 방비대와 가덕도 육전대 부대가 진압 차 출동 하였다. 이것이 통영의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중앙시장의 좌측 입구 구() 제일은행인 스텐다드차트스 은행이 조선식산은행의 통영지점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총독부의 산업과 금융을 지원했던 곳이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 세 번째 집이 통영 우편국이다.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 좌측을 바라보면 붉은 벽돌로 쌓여진 이층집이 일본의 건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문의 생김새나 형태가 붉은벽돌(아카랜가)로 쌓아올린 전향적인 일제 강점기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 주인이 통영우편국이라 했다. 이곳이 53-2번지이다. 주인의 안내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벽을 헐어 문을 내려고 했는데 벽을 깨는데 꼬박 3일이 걸릴 만큼 튼튼하게 벽을 쌓았으며 천장에서 돌을 깨는 징이 다수 나왔다고 말했다. 중앙시장 안에서 일제 강점기의 우편국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다. 이 우편국을 통하여 경남독립단 권오진은 328일 조선독립단경고문과 독립선언서를 일본 내각대신 및 조선 총독부에 발송하여 결국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중앙시장을 가로질러 나오면 만나는 데파트 건물이 통영경찰서이다. 1945815일 해방이 되었으나 소식이 늦어 해방 된 줄도 모르고 일본인들과 일제 경찰들이 활보를 하여 외지에서 해방소식을 들은 이양조가 엽총으로 공포탄을 쏘고 임정복이 경찰서 옆문으로 뛰어 들어가다 일경의 총검에 옆구리를 찔려 사망했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은 임정복의 시신을 상무대 책상위에 눕혀 놓고 시위를 했다. 결국 악질 경찰들은 유치장으로 감금하고 일본인들은 본원사(本院寺)에 감금했다. 경찰서를 접수하고 경찰과 일본인들을 감금한 후 충렬사로 가서 조선독립축하대회를 연 것이다. 충렬사 아래 명정샘 위쪽에 큰 당산나무 아래에서 조선독립축하대회를 했다. 충렬사는 단순한 이순신 장군 사당이 아니라 통영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이 중심이다. 느티나무 아래서 연설을 하고 메구를 치고 독립축하대회를 했다. 가죽고랑을 지나 내려가면서 수많은 인파가 뒤따르며 독립을 축하했다고 한다. 통제영 영노청(營奴廳노비를 관리하는 관청)에서 동본원사로 해방 후 태평성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당으로 오르는 입구 좌측이 통영면사무소터로 추정했다. 통영면사무소는 지금까지 통영읍사무소와 옛 충무시청인 서호동으로 알고 있다. 통영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내어 산양면사무소 등사판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오다가 발각된 곳으로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 곳이다. 또한 영리청(營吏廳 아전을 관리하던 관청)은 포교당으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모의했던 곳이다. 운주당터가 바로 부산지방법원통영지청자리이다. 수많은 독립투사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세병관은 당시 통영공립보통학교로 동맹휴학을 했던 곳이다. 통영교회와 봉래극장도 독립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통영교회 청년부에서 계몽활동을 했으며 봉래극장은 1914년 일본인들이 만들었으나 통영시민들을 위한 브나로드운동, 악극단 순회공연등 계몽, 문화운동을 했던 곳이다. 도의원 김기정 규탄대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1928년 신간회 창립을 했으며 2005년 철거되어 현재는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통영수산고등학교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통영의 3.1운동 삼열사(고채주, 이학이, 허장완)중 한분인 허장완 묘소가 법원 앞에 있으며 원문공원에는 충혼탑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향토사 수업으로 통영의 항일 사적지를 찾아보았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역사가 밝혀지고 정확한 고증으로 오류가 바로 잡아진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통영항일운동 사적지를 고증하여 그 뜻을 기리는 것이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정확한 고증을 해주신 원장님에게 무한 감사를 드린다.



 

2015.6.1. 통영항일운동 사적지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