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통영충렬사 팔사품도병풍

청풍헌 2015. 12. 7. 22:46

 

충렬사팔사품(忠烈祠八賜品) : 815

명의 수군도독 진린(陳璘)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황제에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다.

장군의 의장물로서 통제사가 높은 장막(帳幕)위로 오르면 측근인 비장(裨將) 두 사람이 우립(羽笠)을 쓰고 홍첩리(紅帖裏)를 입고 어깨에 영패를 메고 선다그리고 네 사람의 군관(軍官)이 귀도와 참도를 각각 어깨에 메고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남소령(藍小令旗)를 들고서 앞에 갈라선다팔사물·팔사품 또는 명조팔사품 등 여러 개의 명칭으로 불리어 왔는데 1966년 문화관광부에서 보물 제440통영충렬사 팔사품으로 명명(命名),지정하였다.


충렬사 팔사품을 가로 532cm, 세로 239cm 크기의 8폭 병풍 2벌에 그려 놓은 채색화이다. 충렬사 정침 이충무공의 위패 좌우에 펼쳐져 있는 이 병풍의 하나에는 도독인,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이 가로45cm 세로 181cm 크기의 한지에 차례로 그려져 있고 또 하나에는 신관호 통제사가 쓴 팔사품도병풍을 만든 내력과 도독인을 제외한 7가지 의장물이 그려져 있다. 각 그림마다 신관호 통제사의 낙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통제사가 친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인다. 채색세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낡고 퇴색되어 있는 현존 충렬사팔사품의 원형을 상고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각 그림마다 규격과 오언절구가 행서로 쓰여 있는 귀중한 자료다.


 

통제영에 우러러 받드는 여덟 가지 사물이 있다. 이는 곳 명나라의 수군도독 진린이 이충무공의 전공을 현황제께 아뢰니 황제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이충무공에게 도독의 벼슬을 내리시고 아울러 구리로 된 도독인 1과와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각 1쌍을 내리시어 숭장하고 전권토록 한 것이다. 공이 편방의 배신으로서 천주의 총장을 입어 천하의 명장이 되었으니 옛일에서 찾아보아도 짝할만한 것이 없다. 오호라! 팔사품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옛날에 의지하여 통제사의 의장물로 되어 행 할 때에는 진 앞에 벌려 세우고 그냥 있을 때에는 사당 안에 진열해 놓는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옛 벼슬아치처럼 뽐내는 자는 오직 통제사 뿐이니 지금에 와서 천하에 구해보아도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공의 뒤를 이어 오는 사람들이 공께서 계시던 때와 같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풍천의 감회와 갱장의 그리움이 여기에 의지하여 없어지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관호가 명 을 받들어 통제영의 소임을 맡은 지 4일 만에 삼가 공의 사당에 참배 하고 팔사물을 묘정에 펴놓고 영좌를 첨망하니 양양한 모습이 계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을 거두고 돌아오니 뜰이 텅 비어 물과 같고 한 개의 그림자도 없어졌다. 이 팔사물은 공의 떳떳함인데 공의 사당에서 이들의 그림자도 없게 한다면 뜻있는 선비로서 감개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해 가을향사에 팔사물을 병풍에 그려 영좌의 좌우에 진설 하였으니 이충무공전서 첫머리에 있는 팔사물의 도설을 삼가 본뜬 것이다. 공께서 가신지 300년에 황조의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 공의 사당에 올리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공의 공적과 충렬이 청사에 빛나고 노래로 불려 지며 금석에 세겨 졌으니 다시 어찌 군더더기라 하겠는가. 삼가 그림의 위에 도설을 기록하고 이어 각각 한 구절의 시를 써서 감회를 붙이고 다시 영련의 한 구절을 써서 이르노니 ""산을 두고 맹세하고 서약 하였으며, 검은 해를 깨끗이 씻고 뚫어진 하늘을 꿰매었도다.(맹산서해 욕일보천)""라고 하였다. 숭정기원후 4번째 신유(철종121861) 8월 삼도통제사 평산 후학 신관호 삼가 쓰다.

 

통영시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