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향토사 고금도, 대흥사 답사기

청풍헌 2015. 11. 23. 22:02

향토사 고금도, 대흥사 답사기

향토사 모임이 침체 되었다는 진언을 듣고 원장님 이하 핵심 멤버들이 모였다. 의논 끝에 11월에 답사를 결정하고 장소는 고금도와 대흥사로 정했다. 고금도는 정유재란시기 마지막 통제영을 열었던 곳이며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모셨던 곳이다. 한편 두륜산 대흥사는 전남의 대표적인 사찰로 추사의 흔적과 이광사 대웅보전 현판 이야기가 전해오며 통제사를 역임한 신관호의 글씨가 남아있는 곳이다.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로 언젠가는 가 보아야할 곳으로 생각 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어 좋았다. 백의종군 중에 통제사 재수임(1597.8.3.)을 받고 수군을 규합한 후 명량에서 대 승첩(9.16)을 이룬다.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여 고군산군도에서 군사들을 휴식 시킨 후 다시 남하를 한다. 발음도(10.11)에 진을 치고 18일간 머물다가 이곳도 배를 감추기가 적당하지 않아 목포의 보화도(10.29)로 옮긴다. 보화도는 고화도, 고하도로 불리는 섬으로 육지와 인근 하여 여러모로 유리하였다. 106일간 고하도에서 많은 군사를 모집하고 판옥선을 건조 했으며 군량을 확보했다. 이후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대 함대의 정박지를 찾아야 했으며 함대를 전진 배치하여 일본군을 압박하기 위하여 고금도(1598.2.17.)로 이진 한다. 한편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한 것은 716일이다. 장군은 고금도 덕동리 포구에 진을 치고 나중에 온 진린은 묘당도 앞으로 일부 함대를 거느리고 정박했다.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통제영이며 노량해전(1598.11.19.)에서 전사한 후 유해를 안치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관왕묘가 있다. 관왕은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진린이 주둔 하면서 전쟁의 신인 관우를 모시고 승리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장군의 유해는 남해 관음포에 임시 안치 했다가 이곳 고금도 월송대에 안치 했다가 아산 본가로 영구 되었다. 전사 후 1~2일 만에 본영인 고금도로 옮겨와 월송대에 임의 안치한 후 12월 초에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예조에서 이순신의 장례에 대하여 1211일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이순신의 영구가 이미 고금도를 출발하여 장지인 아산에 도착 예정이라는 보고를 보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기록에 의해서인지 1119일부터 이듬해 1599211일 아산을 옮겼다고 했다. 83일간 이곳에 봉안했다고 하는데 정통한 기록에 의하면 이곳 고금도에 10여 일간 머물렀다고 한다. 장군의 유해는 초분의 형태로 이곳에 모셔져 있다가 유골만 수습하여 운구했을 것이라 추론했다. 즉 민속학 적으로 풀어내면 당시 섬 지방에는 초분이 일반적인 장례 형태였다.(이순신연구논총20 p221 고금도 통제영과 이순신의 전사 후 행적 정진술)

 

충무사는 과거 관왕묘였다. 진린이 광동병을 거느리고 조선을 출병할 때 꿈에 관운장이 현몽하여 진중에 모시고 제향 했다. 고금도에 도착한 후 묘당도의 용금산 아래 사우를 건립 하였다. 전 후 고금도 주민들에 의하여 계속 제향 되다가 점차 관리가 소홀해 졌다. 현종7(1666)에 중수가 있었으며 정조15(1791)에 탄보묘(誕報廟)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묘우(賜額廟宇)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탄묘보에 탄압이 시작되어 훼철 되었다.해방이후 1953년 지방의 유지들이 충무사로 개칭하고 정침에 이순신 장군을 봉안 하였다. 1960년 가리포 첨사 이영남을 배향하고 사적지로 지정했다. 즉 관왕묘-탄보묘-충무사로 변천되었다.(이배사 답사자료14-1)

 

당초 이곳이 관왕묘였는데 충무사로 바뀌면서 이순신 장군을 주벽에 모시고 사적지로 지정 되었다. 장군의 유해가 있었다는 이유로 이곳을 성역화 할 것이라 한다. 실제 장군의 통제영지는 이곳이 아닌 덕동리 포구였다.

 

고금도에서 완도로 가는 방법은 배를 타고 신지도를 건너는 것이다. 아침 출발부터 손을 다친 설 사장은 완도에서 병원에 갔다. 아침부터 차가 늦게 왔었는데 손가락을 다쳤다. 응급처치를 했지만 지혈이 되지 않아 결국 완도에서 병원 처치를 받았다. 완도에서 점심을 먹은 후 대리기사(~리 기사)가 운전하여 청해진 장보고 기념관에 왔다. 해상왕 장보고는 780년대 후반 완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젊은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의 무령군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우고 30세에 군사 1천명을 지휘하는 군중 소장이 되었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828년 흥덕왕을 알현하고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어 1만의 군사를 얻어 완도에 청해진을 열고 해적을 소탕한다. 청해진은 군사적 요충지이며 한, , 일을 잇는 대외 해상무역기지역할을 했으며 중계무역을 실시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 무역 왕이 되었다. 동 아시아 해상세계를 석권한 장보고는 이후 신라왕실의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귀족 김양의 사주를 받은 염장에 의하여 841년 암살당했다. 장보고는 수년전 해신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해 졌으며 장도의 발굴로 청해진지를 일부 복원했다. 해외에 있는 유적으로 중국 산둥반도의 적산법화원과 양주, 영파, 일본 하카타에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두륜산에는 케이블카가 있다. 과거 두륜산 케이블카를 타 보았으나 대흥사는 보지 못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서산대사는 승병을 모집하여 왜란에 참전하고 묘향산의 암자에서 입적 하면서 제자인 사명대사에게 두륜산에 가사와 발우를 두라는 유언을 한다. 이때부터 천년을 이어오면서 대흥사는 발전을 거듭 하였다.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 련, 초의선사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특히 현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면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대웅보전 글씨를 보면서 이런 형편없는 글씨로 편액을 달았냐며 내가 써준 무량수각을 달라고 했다. 수년 후 해배 되면서 들린 추사는 초의를 만나 당초에 걸려있던 대웅보전의 현판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며 다시 달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는 기름기가 쫙 빠진 힘찬 글씨지만 추사의 글씨는 기름진 글씨라 한다. 두툼하면서 안정적인 추사의 글씨는 이후 위당 신관호에 의하여 전승된다. 추사가 귀양 가 있는 동안 초의 선사와 소치 허련은 제주도로 지필묵을 보내 추사와 교류한다. 원교 이광사의 현판은 해탈문(解脫門),침계루(枕溪樓),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殿),원종대가람(圓宗大伽籃)이 있고 위당 신관호는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의 표충비각, 어서각, 대광명전 등의 현판이 있다.

 

향토사 모임의 답사는 일정한 목표가 있다. 통영의 향토사를 공부 하면서 관련된 곳을 찾아서 공부하고 알아가는 과정이다. 왜 유명한 절을 찾아야 하나? 명산대찰이라서? 단풍을 찾아서? 그나마 통제사를 역임한 신관호의 현판을 본 것에 만족 해야겠다. 고금도와 장보고 기념관, 대흥사를 찾아서 향토사 모임의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20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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