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준 통제사는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긴 장본인이다. 그 내용은 두룡포 기사비에 잘 나타나 있다. 토끼와 여우가 뛰놀던 한적한 어촌을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로 발전 시켰다. 이경준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곽산군수로 재임시 호송했다. "상이 선천에 도착 했는데 곽산군수 이경준이 호종을 청하니 따랐다." 대부분 지방수령들이 도망을 간 상태에서 제대로된 밥도 못 먹었는데 곽산군수 이경준이 제대로된 밥을 지어 올리니 감격했다는 것은 배고플 때 밥 한 숫갈이 얼마나 고마운것인지 가슴깊이 남아 있었다. 이후 선전관으로, 함경도 절제사, 충청병사를 거쳐 삼도수군 통제사에 수임 되었다. 하지만 수질(배멀미)이 심하고 탈정기복에 반대하는 상소가 지속적으로 올라와 탈상(삼년상을 벗는 것, 만 24개월만 넘기면 됨)과 동시에 기복 되었다. "이경준의 위인에 대해 그가 선전관으로 있을 적에 내가 본적이 있다. 떠날 때 내가 인견하고 보내겠다." 라고 할 만큼 이경준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는 몽진시 따뜻한 밥 한 그릇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두룡포에 통제영을 열고 세병관을 세울적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갑진년(甲辰年, 1604년) 통제영을 여기 두룡포로 옮길 때 부하 장수로 하여금 묘를 파서 이장케 했는데, 그 자들이 땅을 파고 함부로 도끼질하여 석곽을 파낼 때 금은보화가 많이 나왔다. 통제사가 이를 알고 정결한 곳을 찾아 이장하도록 명하였으나 당시 군졸들이 그만 풀덤불로 덮어두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통제사의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르기를 ‘네가 처음에는 내 장지를 빼앗더니, 더 무슨 원한이 있기에 또 백골마저 박대하느냐?’고 크게 호통을 치므로 놀래 꿈에서 깨어나 부하를 불러 그 무덤에 관한 일을 다그쳐 물었다. 군관이 그제야 그 사체를 길가에 내버려두었다고 실토하므로 통제사는 즉시 그들을 잡아다가 엄중히 다스리는 한편, 나(朴斗甲)에게 곽을 새로 짜고 새 옷을 만들어 백골을 다시 수습하여 북쪽 산에 이장토록 명령하기에 축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엄숙히 이를 시행했다. 이러한 당시의 일을 내가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3일 날 아침에 다시 이수일 통제사를 찾아가 그 모든 사실을 말하니 ‘세월이 오래 되어 나는 자세히 알 수가 없는 일’이라며 딴전을 피울 뿐이므로, 하는 수 없이 쓸쓸히 돌아오고 말았기에 우리 형제가 직접 현장에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후일 참고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는 김여엽, 여욱 형제가 쓴 남행기문에 있다.(김일룡 문화원장님의 향토사 산책). 통제사로 재임할 때 당포 앞바다에 흑색대선이 출몰하여 비상이 걸렸다. 우우후 신여량을 비롯한 첨방부대가 출동하여 적을 괴멸하고 49여명을 사로잡아 한양으로 압송했다. 그 공로를 선조는 당포전양습첩지도를 28명 전원에게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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