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부산포 해전을 공부한 오늘은 행복한 날이다

청풍헌 2016. 3. 26. 09:02

임진장초에 기록된 부산포 해전

본영출발(8/24)-남해땅 관음포-사량-당포(25)-거제도 잘우치-견내량(26)-칠내도(칠천도)-원포(27)-가덕-천성선창(28)-동래땅 장림포해전-가덕 북변(29)-몰운대-화준구미 해전-다대포 해전-서평포 해전-절영도 해전-초량목 해전-부산포 해전-가덕도(9/1)-본영귀영(2)


                                                                                                                                                         송찬섭의 난중일기 p74

올해의 답사 장소로 부산. 울산이 선정되었다. 부산은 임진왜란을 최초로 맞아 가장 피해가 많은 곳이며 일본군의 본거지로 유적이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두 번 째 큰 도시로 답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집행부에서 일단 부산을 답사하기로 하고 막상 계획을 세우니 너무 광범위하여 고민을 했다 한다. 철저한 사전답사와 계획으로 동선(動線)을 파악하여 편안한 답사, 유익한 답사가 되었다. 답사 일정을 복기해본다.

 

부산포 해전은 적의 본거지를 쳐들어간 대단한 작전이다. 한산해전으로 조선수군은 사기 충전 했으며 일본군은 조선수군과의 싸움을 피하라는 본국의 훈령으로 육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즉 배를 계류하고 여차하면 육지로 도망하여 싸우려는 계책이다. 그 이유는 한산 해전의 트라우마에 있었다. 조선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견내량을 지나 가덕도 천성진에 전진기지로 삼고 활동을 개시했다.

 

우리가 먼저 도착한곳은 몰운대다. 이곳은 정운장군 순의비가 있는 곳으로 이순신 장군은 정운장군을 잃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다라고 했다. 부산포 해전에 가장 큰 손실이었다. 몰운대의 정운장군 순의비는 군부대 안쪽이라 사전협의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부산지부장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약간의 기다림 끝에 순의비 앞에 섰다. 남명손서님의 구령에 따라 예를 올리고 설명을 들었다. 정운장군의 절개와 용맹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 순의비에서 숙연해진다. 이곳 앞바다에서 순국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발포만호시절 장군을 보필하며 남쪽 출격을 강력하게 건의 했으며 항상 돌격선봉장으로 활약했다. 고흥의 쌍충사에 이대원 장군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 비는 다대첨사로 온 그의 8대손 정혁에 의하여 세워졌다. 민종혁이 짓고 서유대가 썼다. 서유대 하면 세병관 현판을 쓴 무장이다.

 

몰운대 전망대에서 화준구미에 대한 견해가 있었다. 화준구미가 화손대냐 아니면 움푹 들어간 만이냐 하는 견해 피력이 있었다. 구미라는 단어는 곶 갑 등 해안이 튀어 나온 곳 이라는 견해와 당시의 장계와 전황을 보면 5~6척의 배가 계류되어 있는 곳을 보고 포격을 퍼 부어 배를 버리고 육지부로 도망갔다는 것 때문에 배를 댈 수 있는 만곡부라는 견해가 달랐다. 한자의 해석과 당시 상황의 이해에서 오는 차이다. 화준구미에서 대선 5척을 격침 시켰다. 화손대 전망대는 거리와 시간상 생략하고 다대포 해수욕장 데크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산은 남방으로 중요한 기지였다. 다대포 전투는 두 번 있었다. 먼저 임진왜란 최초 부산포에 진격한 일본본대는 부산포 진성을 함락하고 본대는 동래성으로 가고 일부는 남쪽인 다대포성으로 향했다. 그날(414) 윤홍신 첨사는 성을 방어를 했다. 하지만 날이 새자 많은 수의 일본군이 밀려와 전원이 순국하는 참사가 있었다. 더러는 임진왜란의 최초 승리라 하는데 이는 방어상 시차일 뿐 진정한 승리는 아닌 것이다.

 

사실 일본군을 쳐부수러 왔는데 해상전투가 없이 만나는 쪽쪽 육지에 배를 대고 도망을 가고 도망간 배를 깨부수는 작전이 되었다. 8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적의 소굴로 들어간 장군은 적선 10여척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다대포 에서도 대선 8척을 쳐부수었다. 윤공단에는 첨사윤공홍신 순절비와 함께 양쪽으로 작은 비가 있는데 한 기는 의사윤홍제비이며 하나는 함께 순절한 순란사민비.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사당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단을 세웠다. 정운공 순의비, 윤공단 순절비 등이다. 이곳에 있던 다대포 객사를 몰운대에 옮겨 놓았다. 도시화로 인하여 문화재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지고 있다.

 

서평포는 어디인가? 서평포에서 대선 9척을 격침시켰다. 서평포는 구평동 일대라고 한다. 감천항은 감천문화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동피랑을 밴치마킹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있으나 폐혜도 있다. 다시 조선 함대는 초량목을 향하여 항진한다. 남항대교를 건너면서 화준구미님은 초량목이 제1영도대교 근처라 한다. 즉 절영도 해전은 초량목 근처라는 견해와 가덕첨사님은 현 한진 조선소 근처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대선 2척을 격침시켰다.

 

정탐선을 보내 정탐하니 부산포에 470여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일시에 장사진으로 진격하여 100여척을 격침시켰다. 일본군의 근거지를 포격으로 격파한 통쾌한 승리다. 이는 조선수군의 우수성과 자신감을 배가시킨 가장 큰 전과였다. 당시의 장계를 살펴보면 적들이 길게 5리까지 언덕에 배를 대고 있었다고 하니 대략 여기쯤일 것이다라는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부산포 진성은 초기 진성과 후기진성으로 나뉜다. 즉 초기진성은 임진왜란 발발과 동시에 함락되어 적의 수중에 들어가 적의 소굴이 되었으며 성을 허물어 중산에다 왜성을 쌓았다. 초기진성에서 약 5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일본군은 성을 축조하고 이곳에서 부산포 해전이 벌어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부분 해안가에 배를 대고 있어 함포사격을 가하니 혼비백산하며 왜성으로 피신하여 성안에서 철환과 석환 조총을 쏘고 저항했다. 해상에서 전투를 했다면 전부 수장시킬 수 있었는데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수군이 상륙하여 싸운다는 것은 절대 열세이므로 정박지인 천성포로 귀환한다. 초기진성에 대한 자성으로 자성대라 했다. 왜성의 흔적이 잘나타나 있는 성벽을 올라 보았다. 천수대가 있었던 곳이다.

 

우리는 다시 수영성으로 향했다. 화준구미님은 선소의 유허비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경상좌수영의 전선들을 계류하던 곳이다. 매립 되고 집이 들어서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시종일관 차분한 해설로 선소를 요량해 보라 했다. 좌수영성은 일부가 남아있다. 정상엔 수영 사적원이 있어 해설사의 안용복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었다. 남문의 홍예는 이전해 왔다고 한다. 원래 있었던 곳은 다른 건물이 지어져 하는 수 없어 이곳으로 이건했다. 성문 앞 박견은 여러 이야기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세운 것 이라는 설이 있으며 실제 박견 아래 글씨가 있었던 부분이 시멘트로 덮여 있었다. 문화동 배수지 첨탑의 천록영창같은 현상이다. 천연기념물인 소나무와 푸조나무는 세월을 말해주듯 말없이 서있다. 실상은 당시의 처참한 현상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나이테 어딘가에는 메모리가 저장되어 있다.

 

이번 답사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화준구미님의 잔잔하며 차분하고 해박한 해설이다. 또한 부산지부장이신 남명손서님의 정성 일 것이다. 가장 덕을 본 사람은 격군님이다. 갈수록 이배사에 숨은 고수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산을 수차례 왔다 갔지만 이런 해설을 이런 답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이배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명 답사였다. 부산포해전을 공부한 오늘은 행복한 날이다.




2016.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