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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보전해야 할 것은 문화다 / 조전환

청풍헌 2016. 6. 30. 12:12

[시론] 보전해야 할 것은 문화다 / 조전환

등록 2016-06-29

우리의 문화재 정책은 개발과 보전 사이에 걸린 팽팽한 외줄을 위태롭게 타면서 진행되어왔다. 20여년 한옥 목수로 일하면서 문화재에 대한 여러 경우의 에피소드를 접했다. 개발 현장에서 막사발이라도 하나 나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묻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다. 지난 주말 통영에 6년째 머물고 있는 강제윤 시인의 부탁으로 추용호 소반장의 공방 겸 살림집을 조사하기 위해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강제철거가 집행되는 중이어서 출입금지라는 통영시의 표지가 대문에 붙어 있었고,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모여 통영시의 강제 철거를 막기 위해 공방 앞 천막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99호 추용호(66) 소반장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인 윤기현 선생에게 통영 소반과 소목을 배운 추웅동 장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남겨놓은 주문을 완수하기 위해 스물넷부터 시작한 소반 만드는 일을 결혼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하고 있다. 대물림한 솜씨가 워낙 탁월한지라 2002년 도지정 무형문화재가 되고 다시 2014년 국가지정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에 윤이상 선생 생가 터 바로 옆에 있는 추 장인의 살림집과 공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이 새로 만드는 도로에 포함되어 집을 비우라는 통영시의 통고가 왔다. 말 그대로 보전과 개발이 틈 없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상황이다.

추 장인의 집은 방 두칸에 부엌이 딸린 안채와 한칸 반 사랑채의 단출한 구성이다. 사랑채는 연장을 빼내기 전까지는 소반을 만드는 공방으로 사용되었다. 기둥은 가늘어서 세치 반에서 네치 정도 되어 보인다. 안채의 툇마루 기둥은 삼나무이고, 사개맞춤으로 아주 잘 짜여 있다. 뜯긴 안방 반자 위로 상량도리에는 무진년 4월18일이라는 상량문이 큼직하게 써 있다. 무진년이면 1928년, 1868년이다. 나무의 상태를 봐서는 150년은 족히 되어 보여 1868년일 거라 짐작했는데, 1912년생인 추 장인의 선친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신하였다.

이 집은 조선 후기 남도 바닷가 지역의 민가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툇기둥으로 쓴 삼나무는 습기와 충해에 강한 나무로, 다른 내륙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남해안 지역의 재료이다. 규모는 작지만 조선 후기 주택의 격식과 예법을 제법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는 선비들의 사유가 담긴 사대부가의 건축양식이 서민 가옥에도 전해지는 시기다. 짧게는 150년 길게는 400년 시간 속의 사건들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집의 보전가치다.

추 장인의 개다리소반에 나타나는 세장비와 윤이상의 무악에서 나타나는 가락, 그리고 자귀로 다듬어진 사랑채 홍예보에 맥놀이되는 울림은 이 집이 없어지고 나서는 다시 찾을 수 없다. 목수일은 음악이다. 특히 소목일은 섬세한 음악이다. 호흡과 연결된 리듬으로 자귀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고 톱질을 한다. 끌 먹이는 근육의 떨림은 목리에 편곡되어 소반의 천판을 울린다. 그 소리는 활같이 휜 대들보를 울리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그 집에 잠겨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울림은 윤이상의 음악이나 박경리의 소설이나 한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 마음속의 울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전환 대목, 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문위원

생장시간의 별들의 움직임이 목리로 나무에 남아 있듯이 인간 삶의 흔적이 집에 남아 있다. 집과 마을의 관계 속에 남겨진 그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추용호 장인의 집의 운명은 이제 문화재청으로 넘어간 듯하다. 한때 무분별한 개발의 면죄부가 되었던 문화재 정책이 이제는 제대로 자리잡으면 좋겠다. 그리고 긴 세월을 버텨온 추용호 장인과 그 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조전환 대목, 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