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통제영(統制營) 재지군관(在地軍官) 대두와 가문(家門)형성 (석사학위논문요약)

청풍헌 2017. 6. 21. 21:13

논문요약

석사학위(碩士學位) 논문(論文)

통제영(統制營) 재지군관(在地軍官) 대두와 가문(家門)형성

(통영(統營) 세병관(洗兵館) 좌목(座目)을 중심으로)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 대학원(大學院) 사학과(史學科) 김상현(金尙賢) 2017.2

 

1.머리말

2.통영 세병관 좌목의 분석

3.통제영 군사 편제의 변화와 재지군관의 대두

1)통제영 군사편제의 변화

2)막하의 출신지 변화와 재지군관의 대두

4.재지군관 가문의 형성

1)재지군관 가문의 형성과 기반구축

2)유력 재지군관 가문의 가계

3)재지군관 가문의 특징과 통제영의 성격변화

5.맺음말

참고문헌

 

1.머리말

 

통제영의 창설과 그 실체의 연구 성과를 분석 했다. 군사적(수군) 기능에 대한 연구와 외적(공해) 구조에 대한 연구, 내적(재정) 구조에 대한 연구 등이다. 그러나 통제영의 구성원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여 인적 구성과 재지군관의 세력화에 대하여 세병관 좌목을 중심으로 비교 분석 하였다.

 

2.통영세병관 좌목의 분석

 

세병관에는 역대 통제사들의 막하를 기록한 좌목이 43개 존재한다. 좌목에는 막하의 직위와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다. 직위를 시기별로 분석하면 직위의 변천을 알 수 있고 출신지를 분석하면 재지세력들을 추정할 수 있다. 전체 43기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선조 35(1602)에 제작된 5대 유형 통제사다. 이는 세병관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었다는 말이다. 좌목을 분석하면 해당 통제사의 퇴임시기에 제작한 전통을 알 수 있다. 좌목의 제작은 관례화 되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3세기 동안 만들어졌으며 현재 43기가 남아있다.


3.통제영 군사편제의 변화와 재지군관의 대두

 

1)통제영 군사편제의 변화

설영기

군사편제의 변화에 대하여 설영기는 우후를 중심으로 군관체계의 확립 시기다. 이 시기에는 막하의 선임이 종사관이다. 종사관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된 이 순신의 문민 종사관으로 정경달이 파견 되었다. 1607년 이기빈 통제사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본직으로 경상우수사를 겸직으로 삼으며 종사관을 대신해 우후가 휘하 막하를 통솔한다. 좌목에 기록된 편제의 변화는 종사관-우후-군관(유형 1602)에서 우후-별장-군관(이경준 1611)으로, 우후-군관(성우길 1615)으로 변했다.

확장기

8전선 편대를 완성하고 통영성을 쌓아 수군과 육상군의 상급무임이 필요했다. 확장기 편제의 변화는 중군-군관-선장(신여철 1691), 중군-군관-산성중군-선장천파총(오중주 1718)이다.

*우후와 중군은 통제영에서 막하들을 통솔하고 통제사를 대리하는 직책으로,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도 통영우후와 통영중군으로 혼용되어 기록되었다. 세병관 좌목에도 우후와 중군으로 혼용되어 기재되어 있다.

군문의 위상이 높아짐으로 중군(우후)과 산성중군(육상군)이 나타난다.

완성기

막하들 가운데 상급 무인들은 더욱 체계화되고 하급 무인까지 세분화 되었다. 중군-군관-산성중군-선상천파총-파수별장(이한응 1769), 중군-군관-산성중군-선장-천총-파수별장-파총(조심태 1788), 중군-군관-산성중군-선장-천총-파총-파수별장-지구관(이인수 1802)이다.

 

2)막하의 출신지 변화와 재지군관의 대두

설영기에는 이순신 통제사 휘하의 활약한 군관과 의병들이 많아 전라도 출신의 군관이 많았다가 경상도로 옮겨갔다. 확장기에는 선장과 산성중군의 분리로 고성 출신자들이 대부분 맡았다. 이는 선상생활의 부적응과 배 멀미를 하는 외지인인 대솔군관을 대신해 지역 출신자인 고성인을 직임에 차출한 결과다. 완성기에는 신설된 모든 직임을 고성 출신자가 맡았으며 막하 가운데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4.재지군관 가문의 형성

 

1)재지군관 가문의 형성 과정과 기반 구축

설영기에는 통제영 막하에서 장기 근무한 외지인이 고성이나 거제보다 많았다. 3회 이상 근무자는 12명이다. 확장기와 완성기에는 3회 이상 근무자 23명은 전부 고성 출신자로 이는 직업군인화 했으며 유력 재지군관의 가문을 형성할 소지가 있다.

2)유력 재지군관 가문의 가계

파주 염씨는 이순신 휘하에서 유격장으로 활동한 12대 염언상의 후손이다. 좌목에는 15대 염기례를 비롯하여 16, 17, 18대 까지 8명이 있다. 또한 효자 열녀를 다수 배출 하였다. 3대에 걸쳐 칠 효자와 열녀를 배출했다. 파주 염씨는 경종 3(1723) 94대 이봉상 통제사부터 순조 30(1830) 166대 김영 통제사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100년이 넘도록 유력 재지군관의 가문이 되었다.

한산이씨는 이순신 휘하에서 무공을 세운 14대 이승의 후손이다. 한산이씨의 무임진출은 18대 이창하를 비롯하여 19, 20대 이동흡까지 6명을 배출 하였다. 즉 영조 14(1738)부터 순조 30(1830)까지 3대에 이어 재지군관을 가문을 형성했다.

청주한씨는 19대 한천기의 후손으로 3대손인 한인원부터 26대 한복택까지 5명이 무임을 맡았다. 숙종 8(1682) 61대 원상 통제사부터 정조 13(1789) 143대 이한풍 통제사에 이르기까지 유력 재지군관의 가문을 형성 하였다.

3)유력 재지군관 가문의 특징과 통제영의 성격 변화

첫째 고성의 유력한 재지 가문인 이 세 가문은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에 정착한 가문이다. 둘째 2~3대에 이르러서야 통제영내에 직임을 맡는다. 셋째 선무원종공신의 후손이다. 넷째 효자 열녀 등 정표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한다.

 

5.맺음말


삼도수군통제영의 군사편제와 막하의 변화 추이를 세병관 좌목에 기초하여 분석 하였다. 이러한 군사편제와 막하의 변화에 따라 설영기, 확장기, 완성기로 구분하였다. 설영기의 출신지는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종사관에서 우후로 전환 되었다. 확장기는 통제영 8전선이 확립 되면서 선장이 군관에서 분리 되고 통영성을 방비하는 산성중군이 신설되고 신설된 군임을 대부분 고성 출신자들이 맡았다. 완성기에는 산성중군 휘하의 천총, 파총, 파수별장, 지구관까지 분리 신설 되면서 거의 고성 출신자들이 맡았다. 이는 군사관련 주요 임직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확장기와 완성기의 고성출신자 군관들을 분석하면 재지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주 염씨와 한산 이씨, 청주 한씨이다. 이 세 가문에서는 입향 후 2~3대에서 현지화 되면서 선장과 산성중군을 비롯한 신설되는 주요 군임을 맡아 재지 세력화 하였다. 하지만 사료의 한계로 재지군관 상호간의 혼인관계나 조직의 구성 같은 내밀한 양태를 살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들이 통제영 폐영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변해갔는지도 면밀히 조사해야할 일이다.

 

(): 통제영의 블랙박스 세병관 좌목(座目)을 심도 있게 분석 했다. 2월에 논문을 받고 대략 보았는데 오늘에야 자세히 살펴보았다. 통제영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공부해야 할 주요한 논문이다. 좌목을 기초로 각 가문의 족보를 대조하고 많은 문헌을 찾아 재지군관을 추적해낸 매우 가치 있는 논문이다. 통영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수조도의 섬세한 분석과 통제영 관방에 대한 분석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 원문성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선행연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 되었으면 한다.


2013년 통영 특별전 도록에서

2017.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