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고하도, 고금도 통제영 유적(2018 이배사 정규답사)

청풍헌 2018. 6. 27. 19:40

고하도 배경

명량해전을 치른 후 작전상 후퇴를 고군산 열도까지 한 이순신은 겨울을 나기 위하고 좀 더 적들과 가까운 곳에 주둔하기 위하여 고하도로 수군 진을 옮긴다. 초기 13척의 전선이 15척으로 늘어났으며 북서풍을 막아줄 적당한 장소가 고하도였다. 또한 나무가 많아 배를 모을 수 있으며 이곳에서 106일 동안 유진했다. 겨울을 나면서 40여척의 전선을 확보 했으며 육군 진 소속의 군현을 수군 진으로 바꾸고 면사 첩을 발행하여 수군을 증강하는데 힘을 썼다. 해로 통행 첩을 발급하여 군량을 1만 여 섬이나 비축했다. 수군 증강의 역사적 의의는 명 수군과는 독자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수군을 만들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고하도 학습

고하도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이다. 이 공간을 사적화해야 한다. 1597년 목포진에 유진 하려고 왔으나 15척을 작은 포구에 댈 수 없어 서북풍을 막을 수 있는 이곳에 10 29일에 이진했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면서 수군증강에 전력을 다한다. 고하도 유허비는 1722년에 세웠으며 비각은 1948년 완공되었다. 기념비가 문화재의 가치다. 전남유형문화재 명칭이 목포이충무공고하도기념비이나 공식비명은 충무이공고하도유허비로 기록되어 있다. 남구만의 소재 집에도 기록되어 있다. 초기의 탁본이 교도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각안의 45개의 기판은 주로 1960년도 교육감등이 중수기 등을 달았다.

 

1978년 전남문화재로 지정된 후 2016년 고하도에 지표조사를 했는데 중간정도에서 성축이 나와서 보고서에 정유재란 시에 성을 쌓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섬이니까 성을 쌓지 않았다.(한산도, 고금도 등) 고려시대의 진성이나 별장의 창고로 이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중주 통제사가 별장을 당곶창으로 옮기니 이곳이 잊혀질까 하여 비를 세우노라 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하고 이봉상 통제사가 이 비를 완공한다. 선소자리는 어디인지 우리가 확인해야 할 일이다.

 

고금도 학습

1597 10 29일 고화도로 진을 옮긴 후 약 3개월만인 1598 2 17일 고금도로 들어갔다. 15척의 배가 고하도에서 40척으로 늘어나 고금도로 왔다. 고금도 시기는 친필일기가 없다. 이분의 행록과 편지, 징비록을 통해서 이순신의 생각을 살펴본다. 1598 1 4일까지 일기만 있다. 그 이후는 추적을 할 수 없다. 현감역(監役)(監役: 토목의 일을 맞아보는 선공감의 한 벼슬) 현건에게 쓴 편지에 고금도로 이진을 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고금도는 요충지로 조망 형세가 한산도 보다 배나 좋으며 가장 큰 이유는 증강된 조선 수군의 40척과 장차 합세할 명 수군의 주둔지를 고려한 때문이다. 2 17일 수군 약 2,000명을 이끌고 옮겨와 덕동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데 4월에는 계금의 3,300명의 수군이, 진린은 7월에 합류한다.

 

관왕묘는 명나라 수군들이 모시는 전쟁신이다. 관우를 정전에 모시고 1599 9월에 진린이 친히 술을 따르고 전쟁에 임한다. 전쟁이 끝난 후 진린은 제물을 내려 계속 제향 하라고 부탁한다. 1666년 유비언 수사가 복원, 정전은 관우 상 동무에 진린, 서무에는 18년 후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다. 1791년 정조가 이곳을 탄보묘라는 사액을 내리고 진린과 함께 등자룡을 모셨다. 일제 강점기까지 유지되다가 1935년 춘원 이광수가 현장답사기에 관우사당을 민족혼에 빗대어 이곳을 말살하려는 빌미를 제공하여 조선총독부가 이 공간을 묵살하고 1940년 옥천사란 절로 변형 되었다. 이충무공 유적보존회가 1947년부터 충무계를 조직하여 보존하고 1953년 충무사로 바꾸고 정전에 이순신을 모셨다. 1959년 영정을 그려 걸어놓고 모셨다. 1960년에 고적 제160 묘당도이충무공유적으로 지정되고 1963년도에 국가사적 제114호로 지정 되었다. 관왕묘에서 탄보묘 옥천사 충무사로 변천 되었다.

 

월송대 유감

11 19일 노량에서 전사한 유해는 전투지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10여일 머물렀다. 충무공 가승기록과 백사지에 마량에 갔다가 아산 본향 집으로 갔다고 했다. 예조에서 이순신의 장례 문제에 대하여 12 11일에 이미 고금도를 떠나 아산의 장지에 도착 한다고 선조에게 보고를 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 시신이 80여일 머물렀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충무공은 1599 2 12일 금성 산에 최초로 묻힌다. 이곳에서 출발한 유해는 아산의 고택 뒤에서 3개월 장을 치른다. 경국대전에 문무직급 관련 3개월 장례 규칙이 있다, 집안 사당에서 장례를 치루고 금성 산에 묻혔으나 1604년 공훈책봉 때 1등급으로 추서 되었다. 1614년 충훈부 회의 때 일등공신의 예우에 맞지 않다 하고 집안에서 이장 중지가 모아져서 형식을 갖추어서 1614년 어라 산으로 이장했다. 당시 관련 선무공신 여러 명이 이장된 것을 알 수 있다. 1599 2 12일 금성 산에서 1614년 어라 산으로 이장한 것이다. 1899년 완도군지에도 언급 없으며 1981년 내 고장 전통 가꾸기에도 80일 이야기가 없다. 누가 최초로 80여일 이야기를 했는지 추적해보니 1989년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에서 최초로 언급되었다.

 

소감

올해의 정규 답사에 참여를 했다. 목포 유달산의 노적봉 유래와 이충무공 동상, 유선각 등을 확인하고 고하도로 이동하여 강의를 들었다. 고하도의 이진 이유와 이진 후 수군의 증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또한 현재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았다. 무턱대고 이순신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확한 고증과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한 재정비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목포 유달산과 이곳 고하도까지 케이블카를 건설 하면서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을 스토리텔링 하고자 하는 목포시의 노력은 가상하나 정확한 학술적인 고증아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고금도의 충무사도 여러 변천을 거쳐 사적으로 지정되어 왔으나 묘당도이충무공유적에서 고금도이충무공유적으로 사적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유감인 것은 월송대의 이순신의 시신 안치 기간에 대한 오류가 큰 것을 알았다. 그것을 하루빨리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명쾌한 해설(열선루님)과 깔끔한 진행(운영진)은 이배사호가 제대로 잘 가고 있음을 느낀 하루였다.


2018.6.23





고하도 해설1

고하도 해설2

2018.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