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이순신공세가 복사제본의 서문

청풍헌 2017. 12. 24. 08:18

회정 김기환 저()

이순신공세가 복사제본의 서문

정인섭 근기(謹記)

 

회정 김기환씨는 1876년 5월 1일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도남리 451번지에서 출생, 27세 때 일본국에 유학하여 일본대학에서 4년간 공부했다이때는 대한민국의 시절이었으니그 당시 동경에 있던 한국학생들이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명치 42(융희3) 3월 28일에 제3종 우편물 인가를 얻어 매월 대한흥학보를 발간했다.

김기환씨는 융희 3년 7월 20일에 발행한 그 학보 제5호에 국민필구의 국제급선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그 속에서 각국은 자기이익만을 위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서로 국제공법을 잘 지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또 그는 그 학보 제8호에서 벽인이라는 필명으로 일청전쟁의 원인에 관한 한일청외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그기서 일청전쟁전후의 삼국관계를 설명하여 한국의 처지를 옹호했다그 뿐만 아니라 그는 따로 한국유학생들의 기관지를 발간하여 그 편집장 겸 발행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김기환씨는 일찍이 개화사상을 갖고 있어 그 당시의 유학생들 가운데 강매문일평고원훈최린 그리고 송진우김성수장덕수장택상등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그러다가 1903년 귀국하였는데 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후로는 줄 곳 고향 통영에서 종사하면서 그의 증조부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부하였다는 이념에서 항상 충무공을 숭배하며 그분의 전기연구에 전념하였다.

김기환씨는 통영 명정리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충렬사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기록과 실지답사와 선조들에게 전해온 일화를 정리하여, 54회에 걸친 방대한 저술을 한국 재래의 백지에다가 먹과 붓으로 기록하여 6권의 책자로 분류제본 하였다그리고 그는 이것을 다시 4벌 필사하여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통영 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이 그 소문을 듣고 김기환씨의 저작이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를 검거하기 위하여 호출 하였다가 본시 두벌만 만들었다고 진술하여 다행히 그가 간직하고 있던 네 벌 중에서 두벌을 압수당하고 말았다그리고 또 몇 해 후 새로 갈려 온 일인서장의 간청으로 또 한 벌을 빼앗기고 말았다.

통영에 있던 세병관(해군본부와 같은 것)은 일제 강점기에는 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됐지마는 원래 그 커다란 건물에는 부속건물이 상하로 두 개가 있었다그런데 일본당국이 그 중에서 윗채 하나만 한산도로 이전하고 나머지는 헐어버린다기에 그 당시 명정리에 살고 있던 김기환씨는 그 부속건물의 아래채를 불하받아 서호동 97번지 높은 언덕에다가 옛 모습 그대로 옮겨다 짓고그 집 이름을 녹라정이라고 하여 1935년에 이사하고 그 전에 살던 집을 청산했다그런데 이 정자의 위치는 멀리 한산도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요왼쪽으로는 충렬사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이와 같이 김기환씨는 주야로 이순신장군님을 추모하는 정성이 지극했다.

일본당국은 그가 이 지방의 저명한 인사이고 또 학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그를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경상남도의 부지사로 임명하였다그러나 약 3개월 후 1919년 3월의 독립만세운동 당시 자기 집 머슴 한 명이 피살당한 것을 기회로 그 관직에서 물러났다그 후 약 1년간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서 강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충렬사보존회를 만들어 그 회장에 취임하였고 그의 꿈에 충무공이 여러 번 나타나 보였기에 그 때의 인상을 토대로 해서 충무공의 초상을 손수 그리기도 했다그러다가 제1차 국회의원총선거 때 친척 되는 김재학의 선거운동의 순회연설에 불려 다니기 때문에 충렬사를 돌보는 직책을 그만 두었고나중에는 대한독립촉성회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가 녹라정에 칩거하고 있는 동안 조소앙· 설의식· 조병옥등이 세배를 왔고 아놀드 장군· 러치 장군등과도 친교가 있어 이들 미군장교들에게 비행모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가 1929년 일본 조도전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봉직한지 3년 후 김기환씨의 제 5녀와 결혼하였다그러다가 1946년 서대문 대치동 92번지로 이사하여 중앙대학법문학부장으로 취임했을 때 김기환씨는 여러 달 필자의 집에 와서 체류 중그의 저작원본 이순신공세가의 원고를 인쇄출판하려고 김성수· 장덕수·장택상등을 방문하여 그들의 협조를 청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그러나 그 동안 틈만 있으면 충무공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리는데커다란 두꺼운 백지에다가 굵직한 선으로 검은 먹과 붉은 색깔로 늠름한 민화를 만들어 필자에게 주면서 그의 저서까지 맡겼다그리고는 1968년 10월 20일 그는 노환으로 녹라정에서 사망하였다. (현재 이 정자는 노인회 회관으로 돼있다 한다필자는 한 벌만 남아있는 그의 저작을 필자의 친척 김기오의 문화당인쇄소에서 출판하기로 하고 그기서 조판을 하고 있던 중, 6·25사변이 돌발하였고 그 후 겨우 원본 1부를 찾았다이것이 서자서· 제언· 총목록 및 원본 이순신공세가 권지1의 제1회와 그 다음은 껑충 뛰어 제14회부터 제27회로 된 책 한 권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김기환씨의 차남 김혁주가 부친의 유작 중의 한권을 따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21회부터 제37까지의 것이다이번에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문헌을 정리해보니 결국 총 저술 가운데 제2회부터 제13회까지와 제35회부터 제54회까지가 빠졌으며또 마지막 부분인 부후세령감록이 결해있었다.

필자는 김기환씨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저작 일부나마 복사본 7부를 만들어 충무공연구에 이바지되기를 바라는 바이다충무공에 대한 김기환씨의 집정과 지식은 실로 무궁무진하여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설화도 많이 간직한 분으로서열차 속 같은 데서 이야기가 시작되면 차문의 여객들이 운집하고 도중하차를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맡겨준 원본전질을 몽땅 내지 못한 것은 천추의 원한으로 느끼며 다만 망령의 용서를 빌 따름이다. (1978년 8월 2)

 

정인섭(1905.3.31.~1983)

울산출생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귀국 후 연희전문 교수와 중앙대외국어대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