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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건국 신화와 국가제의

청풍헌 2020. 4. 6. 22:44

신라의 건국 신화와 국가제의

 

채미하

 

1. 머리말

 

오늘날 제의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정일치 시대의 국가제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국가가 형성된 시기에는 탄생 설화가 있으며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제의를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신화는 혁거세 신화와 알영, 알지, 탈해신화 등이다. 이 중 혁거세 신화에는 육촌장 뿐 아니라 알지와 알영과 탈해가 연관되어 있다. 각각의 개별적인 연구는 있었으나 종합적인 분석이 부족하여 신화의 변화와 사회상의 맥락에서 유기적인 관련을 찾고 변화의 역사적 단계를 밝혔다.

 

신라국가제의 중 상고기의 始祖廟와 중고기 이후의 神宮의 주신은 혁거세이다. 혁거세가 국가제의의 대상이 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중대 이후에는 五廟祭가 성립되면서 혁거세에 대한 제의는 변화였다. 이를 위해 시조묘의 제향 대상이 혁거세가 된 이유를 알아보고 신궁 단계에서 알지뿐 아니라 탈해, 알영까지 신궁의 설치 장소에 대하여 의미를 연결해 본다. 신라 중대의 오묘제가 성립되면서 신라의 건국 신화는 크게 변하였다. 이것은 국가제의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건국 신화가 시대적 상황에서 변해가는 모습도 유추해 본다.

 

2. 건국 신화와 始祖廟

 

신라의 始祖廟 건립은 남해왕 3년 봄에 `시조` 혁거세 묘를 세웠고, 四時에 제사 지냈는데 남해왕 친누이 아로가 제사를 담당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혁거세는 관련 기록에는 6춘장들이 알천 언덕 위에 모여 우리들의 위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음을 걱정하며 회의를 했다. 이때 소허촌장 소벌공이 혁거세를 맞이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혁거세가 10여 세(13)가 되자 출생이 신이하여 왕으로 추존했다. 그의 출생은 나정의 수풀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었다와 흰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백마가 나오는 것은 신령스럽고 상스러운 동물을 등장 시켜 성스러운 인물의 등장을 알리는 뜻이다. 혁거세는 자줏빛 알(紫卵)혹은 푸른색의 큰 알(靑大卵)로 태어났다. 알은 생명의 원천이며 태양을 상징하는 뜻으로 하늘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6촌장들은 천자로 생각했다. 삼국유사에는 6촌장들의 시조가 기록되어 있지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혁거세의 신화 속으로 흡수되었다.

 

남해왕 3년에 시조묘가 세워진 후 소지왕 때까지 시조묘에 친사를 했다. 특히 이사금기는 3성 집단이 연맹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박씨 왕족인 혁거세가 친사를 받았는지를 살펴보자.

미추왕 2년에 국조묘에 친사 하였다”, “2년에 시조 묘를 중수하였다라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었다. 여기서 국조묘는 혁거세묘이다. 즉 국조묘가 시조묘인 샘이다. 아달라왕 17(170)에 시조 묘를 중수했다는 말은 혁거세묘의 보수인데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에서 각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제사를 유지하면서 사로국의 제천과 공존하다가 흡수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그 역할이 시조묘이며 혁거세묘가 연맹체의 국조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 시조인 혁거세묘의 위치는 어디일까?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왕 편에 거서간이 승하하자 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더욱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혁거세의 5체를 묻어 오릉이라고 하였는데 사릉이라고도 하였다삼국사기에서는 오릉을 혁거세, 알영, 남해, 유리, 파사로 전한다. 하지만 혁거세는 신이하게 태어났으며 죽음 또한 하늘과 연결되어 있어 오릉 전설과 연결되면서 혁거세묘=오릉으로 인식되었다.

 

알영의 신화를 알아보자. 삼국사기에서는 알영은 혁거세의 비로 알영정에서 용이 나타나 알영을 낳았다. 혁거세의 비가 된 후 잘 보필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천에 목욕시키자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알영의 세력을 배척한 내용이 신화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한다.

 

3. 건국신화와 神宮

 

신라의 신궁 설치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2, 神宮奈乙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始祖初生한 곳이다.” “22대 지증왕이 시조가 탄강한 땅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함으로써,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신궁이 설치된 시기는 소지왕 9(전자) 혹은 지증왕(후자)이라 하는데 소지왕 9년에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증왕이 신궁에 친사한 이후 중고기 대부분의 왕은 신궁에 친사를 했다.

 

신궁에 모신 시조신은 누구일까? 지증왕은 여러 신하의 건의에 따라 국호를 新羅로 하고 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운 후 지금의 22세에 이르기까지라고 기록되어있다. 지증왕은 혁거세로부터 22대 왕이다. 그러므로 신궁의 시조는 혁거세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눌지 마립간 19년 조에 歷代園陵修葺수즙하였다. 여름 4始祖廟에 제사하였다.” 역대원릉의 수즙은 부속건물을 보수 정화하는 의미이다. 눌지왕은 왕릉을 보수하고 혁거세가 모셔진 시조묘에 제사하면서 인정받기 위한 상징적 의미로 파악된다. 삼국의 시조묘와 신라의 신궁은 전 국가적 시조 묘를 제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조는 혈연적 계보를 초월한 성격을 가진다.

 

신궁 단계의 혁거세 신화를 살펴보자. 삼국유사에 혁거세의 위호는 거슬한(거서간)인데 처음 말할 때 알지거서간이 한 번 크게 일어났다고 하여 후에 왕자의 존칭이 되었다. 국호를 서벌, 사라, 사로라 하였는데 왕이 계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계림국은 알지와 관련된 국명이다. 이와 같이 김씨왕실은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왕계를 확립하면서 자신의 시조인 알지는 혁거세 신화에 부회하였다. 진평왕 원년(579)에 상왕이 보낸 천사로부터 옥대를 받고 이것을 凡郊廟大祀皆服之(범교묘대사개복지)하여 왕권이 에 보증받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혁거세를 모신 신궁은 나을이며 양산아래나정 옆이라 했다. (나무와 숲)은 고대인들이 신이 하강하거나 거주하는 공간이며 생명력의 상징으로 신성시했다. 그리고 은 물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물은 생명의 원리이다. 이와같이 산과 물은 다양한 제사의 장소이며 제장이 되기도 한다. 신궁 단계의 혁거세는 다양한 문화 요소를 포함하며 육촌장의 후손을 비롯한 여러 세력을 포용할 수 있었다. 神宮郊廟이다. =, 천지신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며 =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장소이다. 신라의 건국 신화에는 혁거세, 알지, 탈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알영의 신화도 신궁단계 혁거세의 신화가 포용하는 형태이다.

 

4. 건국 신화와 五廟

 

五廟에 대한 기록은 사료에 삼산과 동격으로(미추왕을) 제사하고 (그 격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미추왕의)격을 오릉위에 놓았다가 있다. 이는 미추왕의 제사가 삼산의 제사와 동격이고 미추왕은 오릉보다 상위에 두었다. 신문왕 7(687) 4祖廟(이하 五廟)에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의 신위가 모셔졌다. 이는 예기의' 제후오묘'의 원칙에 의하여 오묘제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문무왕 4년에 "有司에게 명하여 諸王陵園을 옮겼는데 각 20호이다."라고 했다. 이 제왕릉원은 박씨왕릉, 석씨왕릉도 포함되었다. 김씨왕실의 중대 왕실은 少昊金天氏에서 찾았다. 오묘제가 시정된 후 종묘의 수장인 태조대왕에소호금천씨에 연원을 둔 星漢을 모셨다.

 

삼국유사에는"說者가 말하기를 西述聖母가 혁거세를 낳았다. 신모는 중국 제실의 딸인 사소로 진한에 와서 성자를 낳았고 처음 임금이 되었다. 계룡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을 낳았으며 서술성모의 현신이다." 라 했다. 이는 혁거세의 양산기슭에 내려온 큰 알에서 태어남과는 다르다. 부계 중심 이전에 모계 중심으로 서술하는 전통이 있다. 신모가 웅거한 서연산은 진평왕대에 신성산악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부르는 닭이 서쪽이다." 고 하였다. 이는 서연산과 연결된다. 서쪽을 연결하는 것은 알영, 알지, 혁거세 탄생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탈해왕이 세상을 떠나자 소천구에 장사 지내고 후에 신의 명령으로 뼈를 묻었고 뼈를 부숴 소상을 만들어 대궐에 두었다. 다시 동악(토암산)에 안치하였다. 즉 탈해신화를 산신신앙과 연결시켜 이해했으며 혁거세=알영=알지의 탄생을 동일시하였다. 삼국사절요"혁거세와 알영을 二聖이라 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권근이 말했는데 이는 당시에 혁거세와 알영을 二聖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대왕실은 자신들의 왕실계보를 오묘제를 통하여 확보했지만, 여전히 건국시조인 혁거세와 여러 세력을 염두에 두었다.

 

미추왕이 김씨의 시조왕인 것은 일연의 " 지금 세상에서 왕의 능을 시조당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김씨로써 처음 왕에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미추는 혜공왕대 오묘제가 개정되면서 오묘의 수위에 모셔졌다." 이는 미추왕이 시조왕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다. 한편 미추왕릉을 大廟라 칭했다.”라는 기록으로 미추왕이 오묘의 시조로 정해졌으며 오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미추왕의 제사가 五廟의 제사이고 혁거세의 제사는 神宮이었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실질적인 시조와 직계 조상을 모시는 제사가 시행되면서 혈연적 관계가 더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오묘제 개정을 전후하여 신라는 건국시조와 김성시조로 구분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거세는 건국 시조로 역할을 했다. 신라 하대에 신궁제사가 행하여졌으며 경명왕이 매를 잃어버려 신모에게 빌어 찾아 신모를 대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가 백제의 견휜에게 잡혀 자살했다고 하는데 포석정은 왕과 신이 만나는 장소로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여길 수 있다. 남산은 양산으로 혁거세가 탄강한 곳으로 신라 말기까지 혁거세는 건국 시조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5. 맺음말

 

始祖廟는 남해왕 3년에 설치된 혁거세묘이다. 혁거세의 출생은 신이하였고 하늘과 연결되어 있어 6촌장들이 왕으로 추존하였다. 신라 상고기, 특히 이사금기의 3성집단은 각기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박씨집단의 혁거세가 내내 시조묘의 시조로 모셔졌다. 신라연맹체의 제천이 사로국의 시조묘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자연스럽게 사로국의 시조인 혁거세가 국조로 되었다. 혁거세의 죽음도 승천하였다가 7일 후 유체가 떨어져 그것을 각각 장사 지냈는데 이를 오릉이라 하면서 혁거세릉=오릉으로 인식하였다.

 

神宮은 소지왕 9년에 설치되었다. 여기에 모신 신은 혁거세인데 김씨왕실이 아직 연맹적 질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조상이 아닌 혁거세를 모셨다. 이는 혈연적 계보가 아닌 전 국가적 시조왕을 모신 까닭이다. 자신의 시조인 알지는 혁거세의 신화에 부회하였다. 알지거서간이 일어난다든지 국호인 계림국을 혁거세와 연결한 것이 그것이다. 시조의 신격화 작업도 이어졌는데 신궁제사 때 천사옥대를 착용했으며 시조가 탄생한 양산과 나을은 ··이 연결되어있으며 혁거세·알지·탈해가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신궁단계에서 알영신화 역시 혁거세에 포용 되었다.

 

五廟祭는 왕실의 직계 조상을 모시는 제사이다. 신라중대에 김씨왕실은 중국의 전승에 나오는 소호금천씨에서 김성 칭성을 찾고 오묘의 수위에 성한을 태조로 삼았다. 이러한 변화는 혁거세 알영 탈해의 신화를 다르게 생각했으며 혁거세와 알영은 서술성모가 낳았으며 탈해는 동악대왕으로 불렸다고 했다. 혜공왕 때 오묘제가 개정되면서 미추왕이 김성 시조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혁거세와 미추왕이 신라의 시조로 여겼는데 이후 미추왕을 오릉의 우위에 둔 것은 미추왕이 더 높아졌다는 의미다. 이것은 시조묘나 신궁은 자연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면 오묘제에서는 혈연적 계보가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혁거세는 신라의 건국 신화와 국가제의에 변화를 겪었지만 신라 하대의 신궁제사나 경모왕대의 신모활약, 경애왕의 포석정 제사를 보면 혁거세는 여전히 건국시조로 그 역할을 하였다.

 

6. 意見

 

신라의 건국 신화와 국가제의에 대한 본 논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발췌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신화적인 성격의 사료를 과연 얼마나 밑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건국 신화를 타국(중국)의 관점에서 사료를 비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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