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학교

韓國古代神母와 國家祭儀

청풍헌 2020. 4. 8. 09:46

한국고대新母와 국가제의

 -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

 

채미하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 머리말

 

건국신화는 초현실적 초자연적인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여러 요소 중 신모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하여 떠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조선의 웅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그렇다. 신모는 시조보다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다. 시조에 대하여 부수적으로 생각하여 신모의 변화상에 크게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유화와 선도산 신모는 고려 시대 동신성모로 전한다. 왜 선도산 신모가 동신성모로 변했는지 또한 한국 고대 신모가 고려 이후 역사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따라서 우선 신모의 유형을 살피고 한국 고대 신모의 역사성을 생각하며 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 국가제의와 연결할 것이다. 다음으로 고대 신모의 변이를 고려 시대 동신 선모에서 찾아볼 것이다.

 

. 신모의 유형: 시조모와 시조비

 

시조모는 시조의 어머니이며 시조비는 시조의 아내다. 시조모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 웅녀가 있다. 삼국유사에 웅녀는 곰이었으나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었고 환웅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 고구려의 신화에는 유화가 하백의 딸로 해모수와 사통하여 주몽을 낳았다. 이처럼 웅녀와 유화는 천신의 배우자이자 시조의 어머니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최치원이 쓴 釋利貞傳석이정전을 인용하여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에 감응하여 대가야왕과 금관가야 왕을 낳았다고 한다. 또 해인사의 정견청왕사에 모신 정견은 본래 대가양의 왕후로 죽어 가야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가 금관가야를 건국했으며 허왕후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금관가야 왕을 낳았다는 것이다.

 

다시 삼국유사에는 서술성모가 혁거세를 낳았고 계룡이 상서를 나타내어 성자를 낳았고 임금이 되었다고 하면서 혁거세와 알영의 유래를 선도산 신모에서 찾았다. 하지만 웅녀, 유화, 정견모주는 천신의 배우자나 알영이나 허왕후는 시조비로써 시조모와 함께 신모로 여겨졌다. 알영의 유래를 살펴보면 알영정에서 계룡이 나타나 알영을 낳았다고 한다. 또 입술이 부리를 달고 있어 월성의 북천에 목욕시키니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 혁거세와 혼인하여 시조와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허왕후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후한 광무제 건무 24(48)에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시조인 수로왕과 혼인하여 태자 거등왕을 낳고 후한 영제 중평 6(189)에 죽었다고 하는데 시조비로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의 소서노는 시조비이자 시조모이다. 소서노는 삼국사기에 졸본 연타발의 딸로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졸본에서 주몽의 비가 된 후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삼자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

 

이처럼 신모는 시조모와 시조비로 대별되는데 시조모는 천신과 혼인하여 시조를 낳지만 이후 시조비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조모에 대한 관념은 부계 중심의 신화 이전에는 모계 중심의 신화적 전통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대지는 어머니로 이해되며 지모신은 경작과 수확 즉 농경의 여신으로 대체되어 갔다. 신모 역시 지모신인 어머니로 농업신, 곡모신의 성격을 띠었다. 시조모의 역할을 살펴보면 유화는 자신의 아이를 양육했으며 웅녀는 양육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웅녀는 제왕운기에는 환웅의 손녀로 나오며 응제시에는 단군이 직접 신단수로 내려왔다고 하며 응제시주에는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단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웅천왕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을 만들고 단수신과 혼인 시켜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했다. 이는 웅녀를 남성 중심에서 멀어진 연약한 존재, 잃어버린 존재, 타자화된 존재 등으로 인식했다. 여성 중심에서 남성 중심으로 가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는 주몽 신화로 확립되는데 이는 부여의 동명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 한다. 논형, 삼국지등에는 동명의 어머니는 '侍婢, 侍兒시비,시아"로 나온다. '광개토대왕비'위서등에는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녀'로 수신의 딸로 나온다. 고려 이후 역사서인 구삼국지에는 하백녀 유화로 나오며 수신과 농업신을 겸한 '신모'로 불렸다.

 

선도산 신모는 중국제실의 딸인 사소로 서연산에 살다가 지선이 되었는데 자신이 낳았다는 혁거세와 알영은 6촌 세력들이 길렀다. 서연산.서술로는 모량 지역이다. 모량은 6촌의 하나인 무량대수촌의 근거지라 한다. 이를 볼 때 선도신 신모는 일정한 시기에 모량부세력과 결합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 신화에서 유화와 선도산 신모는 그녀들의 고유한 역할인 시조모의 역할을 다하였다. 일정한 역할을 함으로써 그 역사성을 나타내었다고 생각된다.

  

. 국가제의와 神母追崇

 고구려 태후묘에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동명왕 14(B.C. 24) 8월에 동명왕의 어머니가 동부여에서 죽자 신묘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그에 대한 추승으로 태후묘에서 제사 지냈다.

 

백제 온조왕 때 왕모 소서노가 죽자 묘를 세우고 국모로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백제도 소서노를 국모로 모시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유화는 태후묘 뿐 아니라 수신제, 부여신묘, 태후, 수신, 부여신으로 불리며 고구려 국가제의의 대상이었다. 태조왕대 이후 주몽이 국조로 되면서 유화는 국모로 수신제에서 제사가 행해졌다. 수신제는 유화의 주몽 잉태와 출산 신화를 압록강 가에서 재현하는 제사 의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여족 전체의 어머니로 추숭되었다.

 

이런 현상은 허왕후에서 도 찾아진다. 허왕후가 죽은 후 구지 언덕에 장사지내고 처음 배를 맨 곳을 주포촌, 비단 바지를 벗은 산마루를 능현, 깃발이 나타난 곳을 기출변이라 하고 수로왕과 허왕후의 혼례장소에 왕후사를 창건하여 그녀에 대한 추승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박, , 3성의 시조 신화가 있다. 남해왕 3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혁거세를 모셨다. 혁거세는 국조가 되고 신궁의 주신이 되었다. 이후 오묘제가 되면서 그 격에 변화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조에는' 명천대천제사'가 대. . 소사로 편제되었는데 산신제는 산에서 지내는 천제로서 대사에 포함되고 '호국이 삼신'의 활약으로 최고의 신성 산악으로 大事의 대우를 받았다. 선도산은 오악의 하나로 서악이다. 삼국사기제사 조에 선도산은 모량에있으므로 무산대수촌이 있던 모량이다. 무산대수촌의모량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선도산은 삼사의 하나였고 진산이었다. 선도산은 '서연', '서술', '서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최고의 뜻을 가진 수리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선도산은 신라가 나라를 세운 후 국가 제사의 대상이 되었고 최고의 신성 산악이었다. 하지만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대에 오악은 국토의 중앙에 놓이면서 선도산은 소사로 편제되었다.

 

이상에서 한국 고대 신모는 건국 신화에서 시조를 낳거나 양육하고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 되어 추숭되었다. 신라에서는 신모 외에도 '운제산 성모', '치술령 신모'들이 있었다. '호국삼여신'도 역시 신모신앙과 연결 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 고대 신모의 숭배는 다양한 방법으로 추숭된다. 하지만 웅녀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역시 신모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 한국 고대 신모의 變移

 

삼국사기에 김부식은 송에 갔다가 우신관에서 여신상을 보고 이 여신상이 송인에게 선도산 성모라고 설명 들었다. 또 동신 성모를 선도산 신모로 이해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동신사, '동신성모지당'에는 나무로 깎은 여인상이 있는데 부여의 처인 하신의 딸이다. 즉 동신 성모가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인 셈이다. 고려사에서는 문종 11(1057)에 예부의 건의 중에 동신당이 언급되었고 숙종 대부터 대신 로 나오며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왕양은 동신사에서 동신 성모에 제사를 지냈을 것이고 동신 성모가 선도산 신모로 여겼다. 둥신성모는 한국 고대 신모`의 통칭으로 여겨진다. 한편 고려 초기에 건립된 동명성제사는 고려말까지 기록이 있으나 동신사는 고려 초까지만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는 각 지역의 수호신으로 머물렀다. 제왕운기의 성지 성모는 고려 태조의 위숙왕후를 가리키는데 성지 성모는 지리산 천왕이라 한다. 편년통록에는 위숙왕후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제왕운기에는 지리산과 연결되어있다. 고려사에는 지리산의 기록이 중사의 하나로 신상을 모시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신상이 성지 성모 즉 위숙왕후를 가리킨다.

 

선도산 신모는 중국에서 이동하여 선도산에 정착하여 시조를 낳아 나라를 열었으며 나라의 큰 난리 때 진호하고 도와주었다. 위숙왕후를 지리산 천왕으로 본 것은 선도산 신모를 모방하여 이식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고려 왕궁의 건국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한 의도이며 한국 고대 신모가 왕권생성 원리에 작용함을 의미한다.


. 맺음말

 

한국 고대 건국 신화에서 신모를 살펴보고 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 제의와 연결하여 이해해보았다. 또 고려 시대의 동신 성모를 통하여 고대 신무의 변이를 추정했다.

 

고대 신모는 시조모와 시조비가 있다. 시조모는 천신과 혼인하거나(웅녀, 유화, 정견모주) 배우자 없이 아들을 낳은 존재(선도산 신모)였다. 시조비는 알영과 허왕후가 있으며 소서노는 시조모이자 시조비다. 하지만 유화는 시비-시아-하백녀-하백녀 유화로 나오며 신모로 자리 잡았다. 선도산 신모 역시 6촌장과 연합하여 신모로 자리매김하였고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유화와 선도산 산모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 고대 신모 중 유화는 태후묘, 수신제, 신묘에서 태후, 수신, 부여신으로 국가제의 대상으로 내내 추숭을 받았다. 선도산 신모 역시 국가제의를 받았다.

 

선도산 신모는 신라 최고의 제의 대상이었지만 통일 신라 후 그 격에 변화가 있었다. 통일을 전후하여 '호국삼여신'을 모시는 삼신이 대사를 맡으면서 위상에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선도신 신모는 유화와 같이 신모로서 역할을 대했다고 보았다.

 

한편 유화와 선도산 신모는 고려 시대 동신 성모로 전승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동신 성모는 한국 고대 신모를 통칭하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특히 김부식이 선도산 신모를 동신 성모라 한 까닭은 3성 시조 전승과 선도산 신모 전승에 차이가 있었고 주몽 사당이 서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동신 성모를 모신 동신사는 고려 중기 이후에는 보이지 않음으로 조선 시대에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변했다. 선도산 신모는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연결되므로 한국 고대 신모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Ⅵ. 의견


2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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