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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東明에 대한 인식

청풍헌 2020. 4. 17. 09:12

고려 시대 東明에 대한 인식

-국가 제사를 중심으로-

채미하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학술 연구교수

 

머리말

 

고려 시대 동명에 대한 기록은 이규보의 동명왕 편이 있다. 고려 시대에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제사는 국가제의로 거행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연구는 고려사의 예지에 대한 연구와 국가 제사 체계에 대한 연구, 잡사에 대한 연구도 이어져 도교, 산악, 성황 신앙에 대한 연구는 있었으나 동명에 대한 제의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의 제사를 지낸 이유와 의미 및 역할을 따져보고자 한다. 우선 동명 제사에 대한 실체를 살펴보고 다양한 모습과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동명왕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東明聖帝祀의 실체

 

주몽=동명왕=고구려 시조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후 통일 신라에서는 그 흔적이 보이지 않다가 고려 시대에 제사의 흔적이 보인다. 고려사길례 잡사에 숙종 10(1105)에 사신을 보내 동명성제 사당에 옷과 폐백을 드렸고 사신을 보내 송악, 동신의 여러 신묘와 서경의 목멱신, 동명신사와 도철, 암제연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충렬왕 4(1278) 9월에는 사신을 평양에 보내 태조묘, 동명묘, 목멱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사세가에 충렬왕 4년에 성용전, 동명묘, 평양 목멱묘에 제사 지내게 하였고 19년에는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에 참배하고 평양군사, 동명왕묘 및 목멱묘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 또한 사료에 동명왕 사우는 서경의 인리방에 있는데 음력 초하루와 보름인 삭망에도 제사를 지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동명성제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상에서 동명성제사는 고구려 시조 동명욍이 모셔져 있고 초하루와 삭망에 관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왕이 보낸 사신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므로 정기적인 제사와 비정기적인 제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동명성 제사는 언제부터 지내졌을까. 현종 2년 동명왕에게 훈호를 더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적어도 현종 2년 전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태조 23월에 개경과 서경의 훼손된 탑, , 초상을 수선하도록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묘는 서경에 있는 신묘이다. 이 신묘는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녀 부여신을 모시는 신묘이다. 후삼국시기 태봉 정권이 고구려를 표방한 것은 주몽에 대한 추승작업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태조는 평양을 매우 중시했는데 2(919) 10월에 평양성을 쌓고 서경으로 삼았다. 주몽에 대한 추모 시설은 이때 생겼을 것이다. 태조 2년에 탑, , 초상을 수리한 것은 이때를 가리킬 것이다. 고려도경 사우조에 동신성모지의 정전에 장막을 치고 신상을 세워두었는데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로 전해진다. 이후 언급되는 동신당은 선인문 안에 있는데 개경의 문이다. 그러므로 태조 대에 서경에는 동명성제사가 서경에는 동신사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조구제에 환구, 종묘, 사직, 산릉, 진전, 신사 등은 국가 제사로 잡사에 속했다. 잡사에 대한 내용은 연대기만 전하는데 잡사에는 압명제, , 남해신, 성황신사, 천상제, 노인성, 오온신, 명산대천, 기자사, 동명성제사, 예조묘, 모제, 둑제, 천상제, 동신사, 송악묘, 목멱신사, 도철, 암제연 등이다. 이중 초제는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약 222회나 언급될 정도로 중요했다. 개경 내의 신사에는 태뢰를 사용했다고 하여 대사에 사용하는 보다 비교된다. 그만큼 격이 높았다는 말이다. 고려사찬수고려사범례에 따르면 동명성제사에는 제관이 동지추밀원사나 찬성사가 파견되었다. 동지추밀원사는 종2품이고 찬성사는 정2품이다. 고려 친사(환구, 태묘, 선농)에는 태위가 초헌관인데 정2품이다. 이를 비교해보면 동명왕 제사도 국가제의로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고려 국가 제사로 동명왕제사는 고려 초부터 있었으며 국가 제사 중 잡사로 편제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로 볼 때 동명성제사가 국가 제사로 차지하는 위상을 상당하다고 생각된다.

 

.東明崇拜諸相

 

동명성 제사는 잡사에 속하는데 잡사는 전통제례이다. 즉 고려는 토착적·전통적 제사를 중국적 예제에 포함 시키지 않고 별개의 국가제의 체제로 운영했다. 잡사에서 큰 비중인 醮祭가 도교적 제사라면 동명성 제사는 토착 신앙과 관련이 있다. 동명성제사와 동신당 등에도 기우제를 지냈다. 서경에는 다른 추모 시설이나 유적이 다수 보인다. 구제궁은 동명왕의 궁으로 동명왕이 아홉 사다리를 타고 하늘을 왕래했다는 건물이고 그 정전은 천홍전이다. 기린굴은 동명왕이 기린을 사육하던 굴이며 그를 기념해서 세운 기린각이 있는데 그곳에서 왕과 신하들이 학술토론장소로 이용되었다. 영명사는 구제궁과 함께 등장하는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평양부 고적조에 구제궁은 영명사 안에 있고 영명사는 구제궁과 부벽루를 끼고 있었다.

 

태조의 훈요십조 중 제 5조에는 서경을 매우 중시했는데 해마다 2, 5, 8, 11월에 100일 이상 머물도록 하였다. 평양을 순주한 왕들은 동명왕의 원찰인 영명사를 찾아 분향하며 동명왕을 추모했고 구제궁에 거처하며 정무를 보았다고 한다. 성종 4(1087) 10월 정해에 서경 관풍정 및 구제궁을 유람하고 영명사에 행차해 행향 하였다 왕의 진전이고 미륵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의 사찰로 인식된다. 따라서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명왕이 신선이 되었다는 말은 도교와 관련이 있다. 선계는 이상사회와 연결되며 도교의 신선 사상으로 이해된다. 초제를 구정(구제궁)의 뜰에서 제사 지내기도 했으므로 왕들은 구제궁에서 정무를 보면서 서경을 강독하기도 했다. 서경강독은 유교적인 성격이 있으며 이는 동명왕에게 훈호를 내린 것으로 알 수 있다. 명산대천이 잡제이지만 봉호를 내린 것으로 유교적 통치 이념과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전 국토가 왕의 영지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고려 시대 잡사인 동명성 제사를 통하여 동명에 대한 숭배가 토착 신과 연결되어있다. 하지만 양명사는 동명왕의 진전이고 동명왕이 신선이 되었다는 말은 도교적인 측면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명왕에게 훈호 하였다거나 구제궁에서 서경을 강독한 것은 유교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동명왕에 대한 숭배는 상호 보완적인 입장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성제사의 의미

 

고려의 수도인 개경 외에 삼경(, , )을 두었는데 가장 중시된 곳이 서경이다. 태조가 가장 먼저 설치했으며 여기에 분사제도라 하여 개경의 중앙부서와 유사한 조직을 갖추었다. 고려사길례 잡례편에 명종 20(1190) 10월에 서도로 사신을 보내 예조묘에 제사 지내도록 했는데 예조묘는 왕조의 태조를 뜻하므로 태조 왕건의 사당으로 생각된다. 태조묘는 성용전이라 했으므로 태조묘는 성용전이며 태조의 초상을 모신 영전이라 할 수 있다. 고려왕실의 제사 중 태묘와 별묘, 경령전, 제릉은 대사이며 서경의 예조묘는 잡사에, 효사관 의례는 희례 잡의에 둥재되어 었다. 잡사는 길례에 잡의는 희례에 기록하였다. 이 중 잡의에 편제된 효사관은 개경 밖 봉은사에 있던 태조의 진전으로 왕은 연등회 때 이곳에 행차하여 예를 올렸다. 서경의 예조묘도 태조의 진전으로 왕이 친사를 올렸다. 태조의 진전을 모신 곳은 효사관과 예조묘이다.

 

서경에서 이루어진 팔관회는 고구려 계승의식과 관련이 있다. 10월에는 서경에서 팔관회를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맹제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계승의식은 기자묘에서도 알 수 있다. 숙종 7(1102) 10월에 예부에서 기자에 대한 제사가 아직 사전에 오르지 못했는데 분영을 찾아 사당을 세워 제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로써 기자의 사당은 숙종 때 이루어졌으며 기자사에 다른 관청보다 많은 토지를 설정한 것은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기자에 대한 제사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되며 개경의 동신사의 동신성모는 고구려 국모인 하백녀의 사당이므로 고구려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에는 태조의 진전인 예조묘도 있으며 팔관회는 고구려 동맹제를 계승한 것이고 고구려에서 지내던 기자의 제사도 서경에서 이루어졌다.

 

제왕운기의 기록에는 동명왕이 승천하고 유리가 와서 왕위를 이어 시고 장례를 치렀다.(지금의 용산묘이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건국지를 졸본이 아닌 마한의 왕검성이라 하며 주기에 왕검성은 평양이라 했다. 따라서 이승휴는 평양에 동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어서 고려사, 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었다. 이것은 동명왕제사가 고려 초기에 있었고 동명왕의 추모 시설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려 말 고조선 계승 의식이 부각되면서 고구려 계승의식은 약화하였다. 그리고 조선 세종 11(1429) 동명왕이 기사 남쪽 인근의 단군사에 단군과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

 

. 맺음말

 

고려 시대 동명성제사는 국가 제사의 하나로 태조 대에 설치되었다. 이는 잡사로 편제되었는데 잡사는 고려 국가 제사의 체계의 특징으로 특히 왕을 대신하여 사신을 보내 치제 했다는 것은 동명성제사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요소이다. 평양의 영명사와 구제궁 인근은 왕과 동명왕이 시공을 초월하여 만나는 공간으로 영명사는 동명왕의 진전으로 동명왕이 신선이 되었다는 것은 동명왕의 숭배가 불교·도교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볼 때 동명성제사는 유, , , 3교와 토착 신앙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동명성 제사는 고구려 계승 의식과 관계가 있다. 동명성제사는 서경에 있었는데 서경에는 태조묘인 예조묘가 있어 서경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동맹제를 계승한 팔관회나 기자에 대한 제사가 서경에서 이루어진 점등은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고려 말 고조선의 계승의식이 대두되면서 동명성제사는 면면히 이어졌고 조선 세종대 동명이 단군과 함께 배향되면서 동명성제사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 의견

 

사료를 중간중간 인용하는 방법이 바른 것인지 궁금하다.

여러 차례 읽으니 논문의 키워드가 보인다.

먼저 이해를 해야 하니 요약이 어렵다.

 

20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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