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학교

돈암서원(遯巖書院)

청풍헌 2022. 1. 9. 21:19

돈암서원(遯巖書院)(예학을 실천한 서원)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12) 지역 유생들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원래는 근처 임리 숲 말에 있었는데 홍수로 물에 잠겨 1880년(고종 17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유네스코 등록 심사 때 이전한 것 때문에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1660년(현종 1년)에 왕이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돈암은 인근 바위의 이름을 말한다.
사당에는 김장생을 중심으로 김 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장생은 17세기 전반에 예학(禮學)을 집대성하여 사회에 보급하고 그의 제자들은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예학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활발하게 펼쳤다. 김장생은 예학서(禮學書)인 <<가례집람(家禮輯覽>> 을 집필하여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건축물 형태를 도면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하지만 이전하면서 원형이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에서 약간 벗어났다. 돈암서원 원정비에 기록된 건물의 배치도와 지금의 위치는 다르다고 한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앞면에 전서체는 김장생의 증손자인 김난기가 썼다.

 

김장생의 저서에는 <<상례비요()>>, <<가례집람()>>, <<가례집람도설(覽圖說)>>, <<전례문답典禮問答)>><<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가 있고 사후 <<의례문해()>>가 있다.
제향 공간에는 숭례사(崇禮祠)와 전사청이 있는데 숭례사는 문이 잠겨있어 해설사의 도움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축대로 오르는 계단은 양옆에만 있었고 중앙의 신도가 없다. 양쪽에 석 대 두 개가 있으며 하나는 불을 밝히는 용도이고 하나는 관세 하는 대야를 놓는 곳이라 한다. 앞쪽으로 작은 돌을 놓았는데 무슨 용도인지 설왕설래한다고 했다. 돈암서원에는 춘추향사를 중춘과 중추의 중정일에 지내고 있다.
강학 공간에는 가장 중심공간이 응도당(凝道堂)인데 서원 입구의 좌측에 세로로 있었다. 건물은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지붕 양쪽에는 풍판을 달고 눈썹지붕을 달았다. 내부에는 양쪽으로 방을 넣었으며 옮기면서(1971년) 구들을 없애 아궁이가 없다. 응도당(凝道堂)은 한국의 서원 가운데 강학 건물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안쪽 천장에는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이 있었다. 현재의 중앙에 위치한 건물이 양성당(養性堂)인데 문이 달려 답답한 공간을 창출하고 있었다. 유생들의 기숙과 개인 학습공간인 거경재(居敬齋)와 정의재(精義齋)가 있으며 목판과 서책을 보관하는 장판각도 있다. 
서원 밖에 교류공간인 산앙루(山仰樓)가 있다. 다른 서원에는 대문 격인 입구에 이층 누각으로 되어있는데 이곳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고문서를 검색해보니 심원록(尋院錄)은 보이지 않았다. 돈암서원이 사액을 받기 전에는 공주의 충현서원이 호서지방의 중심서원이었다. 충현서원의 심원록은 논문이 있다. 호서지역의 기호학파이며 서인인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과 제자 송준길과 송시열의 사상이 깃든 돈암서원을 답사한 날은 추운 겨울이었다.

2021년 12월 30일

주소: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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