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학교

유애사(遺愛詞)

청풍헌 2022. 1. 8. 09:36

유애사(遺愛詞)

지정종별 전라북도 기념물 제18호 지정일 1974년 9월 24일 소재지 정읍시 344-1(진산 1길 29-5)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이 정읍현감으로 1589(선조22)에 부임하였다가 2년 뒤인 1591(선조24) 3월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이임()하였으니정읍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그 뒤 임진왜란이 지난 후, 1681(숙종)에 유림()들이 공()의 유덕(道德)을 추모하여 사우()를 여아동(지금의 과교동)에 창건하였다그 뒤 9년 후 1689년 숙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니진산동이다영조 때 유애사라는 사액(賜額왕이 현판을 주는 것)을 내렸다그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유애는 유애재민(道愛在民)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1798(정조22) 집의 유희진을 추배하고, 1854(철종5) 주부 유춘필을 추배하였으며사당을 충렬사로 고쳐 불렀다이후 1874(고종11) 도내 유림들의 발의로 다시 유애사라 부르게 되었다사당 앞에 있는 비각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집의공 유희진주부공 유춘필을 새긴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1974년 9월 24일에 지방문화재 기념물 18호로 지정되었다향사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1545(세종27) 한성(漢城건청동에서 태어났으며병조참의(兵曹參議()의 증손이고 정()의 아들이다그는 1598(선조31)에 순국했으니 그 때 나이 53세이다덕수(德水이씨 이며 자()인 본이름 대신 부르기를 여해(汝諧)라 했고, 1576(선조9)에 식년 무과(武科병과(兵科)에 급제하였다함경도 동구비보권관(仇非促權管),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조산포 만호(造山浦 萬戶),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89(선조22) 12월에 정읍현감을 지냈다. 1591(선조24) 2월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에 올라군비확충에 온 힘을 기울였다다음해 임진왜란을 당했다거북선을 만들어 해전에서 왜적을 쳐부수고, 1598(선조31) 11월 19일에 노량해전에서 전사(戰死)하였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선무공신일등(先武功臣一等 )에 서훈(敍勳)되고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서(追敍)되었고좌의정의 벼슬을 내렸다. 1643(인조21)에 충무(忠武)의 시호(諡號)를 내리고온양 현충사(顯忠祠)에서 제사지낸다.

 

유희진(柳希津, 1558~1597)

고흥유씨(高興柳氏)로 자()는 택민()이요()는 신암()이다그는 의사(義士)였다. 1558(명종13) 2월 13일 지금의 정읍시 북면 승부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 임실현감을 거쳐 1588(선조21) 8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로 내직(內職)에 들어갔다가임진왜란을 당하였다동생 희사(希泗)와 이수일(李守一一齋 李恒의 ), 윤황(尹趪무안), 김부(金溥나주등과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와 군량(軍糧) 35()을 장성 남문에 있는 의청(義廳)에 운반하고, 11월 24일 오봉 김제민과 직산과 수원까지 진군했다다음 해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돌아왔다. 1597(선조30)의 정유재란 때에 남라령(南羅嶺속칭 남나리등지금의 북면 승부리)에서 적을 무찌르고동생 희사희문과 같이 순절()하였다. 1798(정조22)에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의 증직이 내렸다장성 오산사(鰲山祠)와 성읍 유애사에서 제사 모신다.

 

유춘필(柳春苾, 1566~1597) 조선 선조 때 의사(義士)이다.

고흥 유씨이고어른이 되어 부른 이름은 '()'는 국형 (國聲)이고 호()는 단구(丹邱이니유희진 공()의 칠촌숙(七寸叔)으로 1566(명종21)에 지금의 입압면 단곡리 차단마을에서 태어났다. 1585(선조18)에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군자감(資監주부(主簿)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김제민김경수유희진과 함께 장성 남문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11월 24일 서울로 진군하다가 여산에 있는 황화정(皇華亭)에서 의곡(義穀) 100여 섬을 좌수영 (左水營)에 보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가동(家童)을 거느리고고을의 북쪽에서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말이 넘어져 적에게 붙잡히게 되어 순절()했다훗날 사람들이 이곳을 한마교라 불렀다지금의 한교북면 소재)이다.

 

-정읍문화재편찬위원, 2017, 정읍문화재지정읍문화원, 1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