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가선대부 삼도 통제사 이응서 거사비(불망비)

청풍헌 2012. 12. 11. 22:16

통제사 이응서에 관한 자료

무전동 장대 굿당에 있는 거사비 

 

 정량동 통영관광호텔옆

  •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1권
    • 下(1894년 이전) ④
1. 이용직민형식 등의 음사, 탐학과 이응서의 선정
李容直은 100만 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忠愍公 李健命의 祀孫으로 永同縣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무력으로 백성들을 괴롭혀 그 피해는 인근 道民에게까지 미쳤다. 그는 호서의 갑부가 된 후 정도에 넘는 사치와 음행을 자행하여 거실은 대궐과 같고 첩은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지만 여자를 대하는 데는 기력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이때 그가 眞靈君의 위력으로 이 관직을 제수받게 되자 조야는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축하인사를 하자 그는, “내가 사는 환경은 公侯와 바꿀 수 없는데 어찌 지방관을 좋아하겠습니까만 영남에는 인물 좋은 여자가 많다고 하니 나는 그곳으로 가서 나의 음욕을 다 채우려고 합니다”라고 하였고, 그 후 그는 하부기관에 지시하기를 “나는 이 여색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하였다. 그가 부임한 후 포졸과 나졸들이 사방으로 나가자 富民들이 그를 보러 들고 나는 것이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그가 부임한지 1년도 안되어 온 道內가 다 탕진되었다.
그리고 이때 閔炯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는 故 判書 閔泳緯의 서자이다. 민영위는 세상에서 여주의 망나니로 불렸다. 민형식은 그의 나이 겨우 30세였지만 매우 교만하고 어리석어 항시 그의 좌우에 칼을 비치하고 있다가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고, 또 원근을 막론하고 사람들을 협박하여 부호들의 재물을 갈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 영남에만 국한하였지만 그는 三道를 관할하기 위해 충청, 전라 양도를 침범하여 선박이 닿을 만한 모든 沿邑은 먼저 그에게 착취를 당하였다. 거부는 5만 내지 6만냥을 상납하고 그 다음은 3만에서 4만냥, 또 그 다음은 1만에서 2만냥을 상납하였으며 1만냥 이하는 1차 상납으로 치지 않고 모두 죄수로 인정하여 家産을 몰수하였으므로 營內에 쌓인 돈은 억대에 달하여 아무리 졸개들이라 하더라도 그때 착취를 맡은 자들은 모두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생들을 모아 風馬 바람난 말. 편자주 놀이를 하며 흥이 절정에 달하면 기생 한 사람에게 1만냥을 주곤 하였으므로 산처럼 쌓였던 돈이 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의 성품은 술을 미친 사람처럼 마셔 은으로 만든 큰 표주박으로 연거푸 수십 표주박씩 마셨고, 또 사람들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여 죽도록 마시게 하였으므로 그의 관할에 있던 수령들은 종종 죽을 뻔한 곤경에 처하였다.
그 예로는 진주 監牧官인 모씨는 술로 죽어 낭가에 실려 나갔는데, 그 시체를 염할 때 그의 시체는 유들유들하여 솜 부대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렇듯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 남의 재산을 탐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백성들은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였지만, 민형식 같은 사람은 고금에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그를 狂賊이라고 하였다.
그는 1년 남짓 있다가 서울에 있는 자기 집으로 100만냥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뱃사공들이 그것을 싣고 도주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경사가 난 양 좋아하였다
이 일에 앞서 통제사 鄭洛鎔부산으로 가는 三南稅米船을 潛商이라고 속여 해로를 가로막고, 그 稅米를 모두 약탈하고 또 松禁을 핑계로 沿郡 島陸民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수만 냥의 재산을 모으므로 사람들은 統營을 설치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민형식의 虐政을 경험하였으므로 정통제사는 부처님 같다고 하였다.
통영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소식이 잘 통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문책할 일이 있어도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 통제사는 대개 사납고 무식한 사람이 많아, 남의 재산을 탐내지 않으면 백성들을 가혹하게 부리거나 술과 여색에 빠져 위엄을 함부로 부리며 누가 감히 자기를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므로 南道 백성들은 그를 海王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그중 邊務에 유의하여 公事에 힘을 쓴 사람은 근세에 李膺緖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므로 통영 사람들은 李某가 부임한 이후 三統使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 삼통사인 蔡東健은 智將이었으며 金鍵은 威將, 申檍은 福將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응서를 따를 수 없었다. 이응서는 그 후 70세의 나이로 다시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철종 말년이었다. 이때 그는 성곽을 쌓고 선박을 보수하는가 하면 총과 포를 제조하고 소금과 땔감을 저장하여, 흡사 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았고 늠름하게 적과 대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봉급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사직하고 돌아올 때도 그는 손에 채찍 하나만 들고 왔으므로 그곳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
채동건이 하루는 戰船을 검열하다가 한 艙板을 가리키며 “이 나무 속에는 좀이 들어 있으므로 바꾸라”고 하였다. 톱으로 베어 보니 과연 나무가 썩고 벌레가 먹었으므로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가 특이한 神術을 가지고 있는가 싶어 그를 두려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