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섬 이야기

(한산도 문어포 탐방) 오라버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청풍헌 2013. 3. 18. 23:24

한산도 한바퀴

언제 부터 마음에 품었었다.

한산해전과 제승당이 있었던곳 곳곳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서린 한산도

그 섬을 오롯히 걸어서 느끼고자 한다.

 

한산도는 한산면 두억리와 염호리 창좌리 하소리의  행정구역으로 나눠지며 오늘은 해안선을 걸어서 탐방 하고자 마음 먹었다.

연안 여객 터미날에서 1시간 간격으로 배가 있어 문어포나 의항마을로 가서 꺼꾸로 걸어오면 오후6시반 배를 타고 나오면 된다.

터미날에서 물어보니 의항가는 배는 11시에 있다 함으로 11시 배를 타고 의항으로 들어가

버스로 문어포로 이동 하였다.

멀리서 바라만 본 "한산대첩비"그것이 궁금 하였다.

한산대첩비.

1979년도에 거창하게 세워진 대첩비인데 79년 12.26이후 모든 공사 계획등이 중단되고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토요일 9시30분경 통영연안여객선 터미날 모습이다.

등산객 낚시꾼 섬사람들이 뒤섞여 배를 기다리고있다. 

11시 배는 제승당에 손님을 하선시키고  의항으로 간다.

한산만 입구는 해갑도와 죽도가 있어 노출이 쉬이 안되며 한번 들어오면 물길이 두갈래로 나뉘는데

우측으로는 의항(개미목)이며 좌측으로는 대고포에 이른다.

배시간에 맞추어 항상 버스가 대기해 있다.

버스는 의항 뱃머리 깃점으로 두대 제승당 뱃머리 깃점으로 두대가 운행된다고 한다.

그러니 도합 4대가 뱃시간에 맞추어 운행되고있다.

기사 아저씨에게 대첩비에 간다고 이야기 하니 여러 이야기를 하신다.

박정희 대통령만 살았으면 여기가 멋지게 되었을건데...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이야기 했더니 당시 계획이 제승당에 참배를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이곳으로 와 대첩비를 관람하고 숙소에서 하룻밤 체류하는 역사 순례탐방을 계획 했었는데 그만...

또 멀리 영운리 남산아래 까지 케이블카를 연결하여 수송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대첩비 있는 곳에 가면 아래쪽으로 케이블카의 기초가 있으며

멀리 보이는 영운리 남산 중턱 흰 바위 있는곳 어디에 시멘트로 기초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는 참말인지 알수가 없다.

한산대첩비 가는 들머리다.

태풍으로 혹은 어떤 이유에서 건 쓰러진 나무로 튼실한 울타리를 쌓아 놓았다.

이렇게 세우기도 힘들텐데.

아마도 고라니나 멧돼지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한 견고한 목책성木柵城인가 보다

밭에서 일하시는 마을 어른을 한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너무나 사랑 하시어 성역화를 지시 하여 대첩비를 세우고

길 아래쪽 바닷가에는 숙박 시설을 만들어 숙박을 하면서 이곳 언덕에는 놀이공원을 만들어

역사와 놀이를 겸한 체험관광지를 만들려고 했단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난후 30여년을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이렇게 방치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번 국회의원때 제승당을 왔다 갔는데 그때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계속 개발 할 의사를 비쳤다고 한다.

시작은 아버지가 했지만 마지막을 딸이 했으면 하는 바램을 주민은 기대하고 있다.

저쪽에 보이는 나무가 신목이라고 한다.

당산나무다.

지난 30여년을 방치된 가로수 조림은 멋대로 자라 길의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 한산대첩 기념비는 비의 둘레에 화강석 반석을 깔고 그 위에 기단을 설치하고 다시 그위에

거북선 좌대를 3M 거북선 위에 15.3M의 기념비를 세워 총  높이 20M의 위용을 나타내었다. 

거북의 머리는 일본 동경을 향하여 다시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호적인 역할을 하고있다.

탑의 옆부분에도 거북선이 졍교하게 조각되어있다.

케이블카 기초터를 찾느라 이리저리 다니다가 만난 할미꽃.

어느 무덤가에 함초롬히 피어난 할미꽃은 예전에는 참 많이 보였던 꽃이다.

할머니의 무덤가에 핀다는 할미꽃은 슬픈 전설이 있는 꽃이다.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과 꼬부라진 허리를 닮았다 하여 할미꽃이라 했다.

 

세딸을 키우다가 장성하여 시집을 보냈는데

이후 너무나 보고싶에 딸네집을 찾아 나섰는데

첫째딸 집은 돈 많은 집안에 시집 보냈는데 초라한 행색의 어머니를 보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둘째딸은 선비집에 보냈는데 서방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누룽지 한 뭉치만 주고 보냈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날 마음씨 착한 사내에게 시집간 막내딸은 집앞의 눈을 치우다

그곳에 쓰러져 죽어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양지 바른곳에 묻어 주었다.

이후 어머니의 무덤가에 자주빛 댕기를 닮은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세딸을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넋을 기리는 뜻에서 할미꽃이라 했다

 

흰동백 

 

문어포 당산 나무에 왔다.

그곳에는 무었이 있을까?

큰 소나무와 팽나무 사이에 당집이 보이고 당집은 문짝이 떨어져 나갔으며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당집이 방치되고 있었다.

문어포는 어촌마을로 동제를 지냈다.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곳 명산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당제를 지냈는데 이후 제관을 서로 안 할려고 하여 스님을 모시고 당제를 지냈다.

이후 마을 청년회가 주관이 되어 새로 당집을 짓고 당제를 올렸으나 작년까지는 당제를 지냈으나 올해부터는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에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전통의 습속이 단절되는것 같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너진 당집과 떨어져 나간 문짝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문어포 마을

혹자는 마을에 문어가 많이 잡혀 문어포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問語浦는 그야말로 말로써 물어본 개다.

 

한산해전에서 대패한 왜구가 우왕좌왕 도망을  가다가  열두강정에 어떤 할매가 있는것을 보고 이쪽으로 가면 일본으로 나가는 물길이 있는지 물어보아

관군과 미리 약조를 한 상태라 이쪽으로 가면 물길이 있다고 하여 유인하고 깃대먼당에 신호를 보냈다.

물길이 있다는 말만 밑고 노를 저어 왔건만 길이 막혀 개미때처럼 기어올라 바다로 나가기 위하여 땅을 파다가 전부 잡혀 죽었다고 한다.

왜놈들이 길은 물었다고 문어포라는 지명유래가 있다.

이 마을은 한산본도 최고봉인 망산에서 뻣어나온 줄기가 끊어질듯 이어져 마치 게의 집게다리 처럼 길게 뻣어나간 형상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바다물 위에서 학을 품은 형상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성씨들이 이주를 해서 살고있다가 구한말 일본이 러일전쟁을 대비 한다고 망산에 망대를 설치하고

이곳 문어포에 상륙하여 1개 대대병력을 주둔하고 포진지를 구축 하였다.

최근까지 대일본제국이라는 화강석 표지석이 마을의 다섯군데나 있었는데 마을 청년들이 없애버렸다(1975)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이후 주민들의 토지를 돌려 받고자 했으나

또다시 제승당 성역화작업으로 국유지의 조림지역으로 변하여 주민들의 토지 소유권의 여망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휴식이 필요한 장소

이 마을은 식수난으로 매우 고생을 햇다.

다행히 망곡 소류지가 완성되고 부터는 식수난을 해결했다.

1934년 2월 10일자 통영군지 제3권 에 동네 우물인 송화천이 소개되고 있다.

 

"한산면에 있는  문어포는 호수30에 인구 90여의 작은 마을로서 매양 샘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에 김석출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새로이 우물을 파기로 하였다.

온 동네사람들의 각고의 노력끝에 드디어 물맛좋고 시원한 물이 솟는 물의 근원을 찾아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이 물걱정 없이 안연한 생활을 하였다"

문어포는 토질이 척박하고 조그만 밭때기 밖에 없어 일찍 바다로 진출 했었다.

특히 주낙어업(연승)으로 이름난 곳이다.

주낙으로는 돔,민어,조기,삼치등을 잡았다.

선창에 출하 준비가 된 주낙 바구니들

붉은 깃발이 있는 배가 주낙배라고 한다.

주낙을 놓으면 부표와 함께 깃발을 세워 낚시의 위치를 표시한다.

문어포에는  '문화역사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선정되어 통영문화원 주관으로

지난 2005년부터 10억(관광기금 7억, 시비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마을회관 신축, 체험가옥 신축, 서비스센터 등의 시설이 건립됐으며,

특히 특색 있는 마을 환경을 위해 황토길을 조성했다

2009년 5월 18일 준공식을 하는 문어포문화역사마을(한산신문에서)

4년여가 지난 지금의 문어포 마을은 활기를 잃은 마을 같이 보인다.

적어도 지금 내가 보기에는...

관련 홈페이지도 없으며 시청 홈피에도 찾기가 힘들다. 

마을 끝부분에 왔다

저쪽으로 더 돌아가면 일본군 진지가 있었던 곳이며 왜구들에게 길을 안내했던 할매가 개발 하던 열두강정이 있다.

 

문어포 교회

 

벽화로 문어를 그려 놓았다.

 

 

문어포 국민학교에 왔다.

한때는 가구수가 80여호에 학생수가 120여명 이었다고 한다.

보통 한집에 두명 이상 학교를 다니면 충분하게 그렇게 된다.

 어느 마을 없이 교육열은 높아서 이 마을에도 서당이 있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창동에 생긴 한산국민학교와 해방후 한산공민학교까지 먼길을 걸어 다니며 배움의 갈증을 해소했다.

하지만 너무나 먼길을 다니는 자녀들을 위하여 동사를 헐고 한산국민학교 교사 한칸을 헐어 옮겨 한산면 최초로 한산초등학교

문어포분교를 허가 받았는데 그때가 1959년 6월1일이었다.

잡초가 우거진 운동장에는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이 보이고

운동장 한가운데는 회전그네가 녹슬어 세월을 무상하게 한다.

이 학교는 설립이후 태풍으로 소실되어 그 부지를 팔려고 교육청에 이야기 했으나 한번 기증된 토지는 되돌려 줄 수 없다 하여

주민들이 자력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현 위치에 슬레이트 교사를 신축하였다.

이후 제승당 성역화 작업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슬라브로 지어 공부를 하다가 1970년 두억국민학교 문어포 분교로 바뀌고

1983년 2월 20일자  졸업생 231명을 배출하고 폐교 되었다.

아이들이 자잘거리던 골마루는 귀신이 나올만큼 얼씨년 스럽다.

 

교실바닥에 흩어진 책받침 몽당연필과 자 칼들은 당시의 소중한 추억이다.

문어포를 나오며 반사경에서 한컷!

 

동생한테 전화하여 한산도를 걷고 있다고 했더니

오빠 너무 무리하지 마소. 탐방도 좋지만 건강을 생각해 무리하지 마세요.

이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2013.3.16(토) 문어포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