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여행 이야기

낙안읍성 정문은 어디인가?(남문 or 동문)

청풍헌 2013. 5. 9. 05:48

통영성을 걷고나서 원문성이 궁금 하였다.

세번의 답사에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벽에 부딪혀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어 돌파구를 찾고자 낙안읍성을 갔다.

복원된 성곽을 살펴보고 원문성을 추론해 보고자 한다

약 두시간의 운전으로 낙안읍성에 도착 안내소의 문화관광 해설사와 대화했다.

 

 

낙안읍성은 조선 전기부터 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곽과 객사가 있었으며

행정기관 즉 읍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 그곳을 복원하여 관광지화 했다고 한다.

1983년 6월 사적지 제302로 지정되고 예산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복원을 했으며 현재 살고 있는 주민은 실제 거주 하고 있는 주민들이다.

사적지로 지정되면 모든 건축의 증개축이 제한되며 불편한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민박과 체험시설 입장료 수입의 분배등등

현지 주민들과 공생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있다.

 

객사

전패

학교 교실의 칸막이를  달았던 흔적

 

성내에 남아있는 옛건물은 객사만 유일하게 남았다.

일제 강점기 객사는 주로 교육기관으로 활용 했으며 행정 기관이었던 동헌은 군청등으로 사용하다가 거의 헐렸다.

객사는 당시의 건물이며 나머지 건물은 발굴 조사하여 복원한 건물이다.

동헌인 사무당使無堂은 논어에서 따온 당호인데 송사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이며 고을을 잘 다스리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동헌인 사무당

송사중인 수령 

동헌과 객사의 차이점은

객사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지내는 곳이며 중앙이나 지방에서 손님이 오면 머무는 곳으로

여러 행사를 주관하던 곳이기도 하다.즉 암행어사나 어명을 갖고 오는 중앙관리들이 집행을 하던 곳이다.

객사에는 단청을 하는데 이는 지방 권력의 상징이며 중요한 기관이라 단청을 했으며 통상 동헌에는 단청을 하지않았다.,

단청을 하는데는 돈이 많이 소요 된다고 한다.

 

전패

궐패와 전패의 차이점은 ?

궐패는 중국의 황제를 지칭하는 "궐"闕를 나무에 돋을 세김으로 세겨서 궁궐에 모시고 예를 표했던 사대주의의 산물이다.

즉 황제를 상징하는 패인데 살아있는 황제를 모시는 형상이므로 대궐의 정전에 모시고 임금이 배례를 했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세겨 모시고 망궐례望闕禮를 했다.(전하!)

조선시대는 강력한 왕권의 시대였다.절대 권력자인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패 였다고 한다.

통상 궐패는 임금이 계신 대궐의 정전에 모셨으며 지방 객사에는 전패를 모셔 임금을 대하듯 하였다.

대한제국을 선언한 고종 이후에는 황제국이므로 전패를 치우고 궐패를 모시도록 했다.

고종 34권, 33년(1896 병신 / 대한 건양(建陽) 1년) 8월 15일(양력) 1번째기사
지방의 각 부·목·군의 ‘전패’를 ‘궐패’로 고쳐 부르는 데에 관한 안건 등을 모두 반포하다.

 

전패가 매우 위험한 이유는?(전패의 변)

지방 수령들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선정을 배풀기도 하지만 탐관오리들도 있었다.

탐관오리들을 골탕 먹이기 위하여 전패를 훼손하여 그 내용이 중앙에 알려지면 파직되고 지방이 강등 되거나 심지어  현이 폐현 되기도 했다.

즉 임금이나 황제를 능멸하는것이라 생각하여 매우 언격하게 관리되었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정조 34권, 16년(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1월 7일(정축) 1번째기사     
            
충청도 오영장(五營將)을 삭탈 관직하고 엄히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직산현(稷山縣)의 전패(殿牌)를 도적질한 죄인을 기한이 다 되도록 잡지 못했다는 전 도백(道伯) 박종악(朴宗岳)의 장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안에는 기와집이 없다.관청 외에는 전부 초가집이다.

읍성 안에는 평민과 하층민들이 살았다.아전이나 동헌의 종,백정 갓바치등등 

지방의 호족들이나 양반들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가의 주위에는 될수있는 한 곁에 안갈려고 했었다.

아무래도 옆에 있으면 각종 간섭을 받으며 수령 때문에 눈치가 보여 성밖에 거주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안에는 하층민들만 거주 했으며 타지에서도 각종 거래나 장사치들이 왕래하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동문

낙풍루(동문) 

1872년도 낙안읍성

 

 

읍성은 풍수지리학상 동,서,남문만 설치를 했다.

낙안읍성은 현재 동문과 남문을 복원 했으며 서문은 마을 주민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차량이 출입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철저한 관리를 하여 무분별한 출입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통상 남문이 정문인데 이곳은 동문이 정문이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동문은 문이 세개이고 남문은 한개라고 한다.

또한 남문으로 시신을 운구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통상 시신이 들락거리는 문은 시구문이라고 암문이나 정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들락거린다.

남문은 앞의 농사를 짓는 들판과 연결되며 길 양옆으로 작은 골목이 잘 발달되어 있다.

이는 서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지장을 최소화 하기위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이것을 볼때 동문이 정문으로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길을 내면서 자연스럽게 동문이 정문 형식이 되었으나 남문이 원래 정문이라는 설도 있다)

 

성벽위 여장

동문성 문루

총안

성벽위와 치

 

해자

 

복원된 동문과 남문은 개거식이며 1층이고 치와 해자가 잘 되어있다.

또한 여장은 성문 주위에 있으며 총안은 선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유산이다.

실제 성안에서 총안을 보니 성 아래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화살이나 총알이 곡선으로 날아오면 절대 들어 올 수 없는 구조다.

 

귀부龜趺

철비 부

철비 趺 

 

 

객사,동헌,내아,옥사등이 있으며 전시관도 있다.

각종 유구를 발굴하여 전시해 놓았는데 부가 여러개 있는데 비신의 홈이 좁으며 철이 있어 자세히 보니

철비를 세웠던 부 였다.철의 조각이 보이고 좁은 비신의 자리는 확실한 철비를 세웠던 것이다.

 

임경업 장군 비각

임경업 장군 비

내아

 

 

 

노거수

 

 

객사에서는 각종 공연을 하며 동문 입구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성안에는 체험시설(공방,염색,짚공예 등등...),민박,식당등이 있고 주민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었다.

주민들과 같이 호흡하는 관광지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비록 사적지 안 이라도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과 이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주민자치회와 입장료 수입의 일정부분을 보완해 주는 관 민의 합작으로 연간 110만명 이상 오는 관광지였다.

 

2013.5.5 순천 낙안읍성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