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여행 이야기

1400년전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청풍헌 2013. 4. 5. 20:58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곳 백제의 문화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였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명문,서동요와 무왕 선화공주의 삼국유사에 기초한 여러 가지가 단편적인 지식의 연속성을 가지기 위하여

공부가 필요했다.익산까지는 220km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꽤 먼거리였다.

1박을 해야할지 어떨지 몰라 일단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과 강경까지 볼 요량으로 계획하고 출발했다.

익산 마륵사지 유물 전시관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의 일부는 진품 일부는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1910년도의 미륵사지 모습이다.

서탑은 거의 허물어졌고 당간지주만 덩그러이 남았다.

(익산시청)

이후 일제 강점기(1915) 무너져 가는 탑에 시멘트를 덧발라 흉물스럽게 서있었다.

더이상 허물어지는 국보를 방치할 수 없어 완전 해체 보수 하기로 결정하고 해체에 들어갔다.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무왕(600~641년) 때 창건된 가람이다.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에 기록되어있다.

무왕이 아내인 선화 공주와 같이 사자사의 지법스님을 만나러 가는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러렀을 때

물속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타나 두사람이 길을 멈추고 예를 올렸고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니 미륵사라 칭했다.

미륵 삼존불을 따라 금당과 탑과 회랑을 세곳에 세웠다.

발굴결과 중앙에는 목탑의 초석이 발견 되었으며 세개의 금당지와 회랑의 유구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증명되었다.

 

박물관을 나와서 야외로 나왔다.

멀리 동탑이 보이고 서탑이 있었던 자리는 가건물이 들어섰다.

야외 전시장에 각종 석재들을 쌓아 놓았다.백제시대 장인들의 숨결이 서린 탑의 돌들이다.

자세히 살피니 몸돌에 뽀쪽한 돌기도 보이고 대부분 약간 투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이 나는 석재들이 쌓여있다.

이러한 돌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석탑을 이루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석탑은 목탑의 형식으로 제조된 석탑이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양식을 보여준다.

 

해체된 탑의 유구에서 목탑양식의 흔적이다.

 

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륵사지 서탑의 발굴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가슴이 벌렁 거렸다.1,400년전의 현장을 본다고 생각하니...

언듯 보기에는 모래흙 같다.발굴흔적은 석회석의 흰줄로 표시되어있고 심초석의 자리가 정 중앙에 있었다

저곳에서 사리함과 명문이 출토 되었다.

 

 

제일 눈에 뛰는 것은 명문에 먼저 관심이 갔다.

누구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가 있는 서동요와 삼국유사에 있는 미륵사의 창건 설화로 알고있다.

하지만 미륵사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 사리 장엄구와 명문이 나왔다.

이보다 더 확실한 유물은 없다.

역사란 유물이나 양식 형식등을 보고 추론하고 연관성을 찾아서 예상하고 추론할 뿐 그것이 인정되면 학계에 정설로 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세에 어떠한 경우에 결정적인 유물이 출토되면 그것이 뒤집히기도 한다.

미륵사지에서 나온 명문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즉 삼국유사에 무왕이 선화공주와 같이 사자사의 스님을 찾아 가다 미륵불이 출현하여 여기에다 3당3탑을 쌓았다는 설화가 있다고

기록되어있어 누구나 무왕과 선화공주가 이 절을 세웠다고 했었다.

그러나 명문이 나오면서 선화공주가 아니고 사택적덕의 딸이 왕비임이 밝혀졌다.

 

원문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대,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원하옵나니, 왕후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 김상현 동국대 교수

 

명문! 다른 어떠한 물건보다도 명문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역사를 바꾸고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 어떠한 추론보다 정확한 것은 없다.

당시의 명문이 나왔기 때문에...

이름다운 조각의 사리함과 내호 및 유리병 푸른 빛이 감도는 유리병은 납유리라고 한다.

백제시대에만 나타나는 유리색갈이다.푸른색의 유리.

 

백제의 역사에 대하여 모르는게 너무 많다.

어럽풋이 감만 있다가 1400년전의 유물을 대하고는 머리를 한대 맞은 느낌이다.

역시 역사는 좀 더 깊은 공부를 해야한다.

많은 생각과 추론을 하며 작은 흔적도 소홀히 하지말며 끝까지 추적하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

 

 

전시된 발굴 사진을 보고 뒷쪽으로 나오니 금당터가 있다.

3탑 3금당인데 보통의 사찰에는 일탑 1금당 혹은 2탑 1금당이며 금당 뒤쪽은 강당이다.

강당은 스님이 경전을 공부하는 곳이다.

금당은 부처님을 모신곳이다.

그러나 마륵사지는 3탑 3금당의 대 가람으로 그 초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좌우 금당터는 초석이 웅장하게 남아 있으며 중앙의 금당터의 초석도 발굴 되었다.

중앙의 탑은 목탑의 초석이 발굴되어 중앙에는 큰 목탑이며 양 옆으로는 석탑이 존재하는데 목탑과 금당,강당 회랑은 전부 소실되고

오로비 남은 것이 서탑인데 거의 허물어져 일제 강점기 허물어진 부분을 시맨트로 보수하여

더 붕괴되기전에 전면 해체 보수를 하기로 하고 해체중에 명문과 사리함이 나왔다.

동탑은 당시 정부의 예산으로 복원을 했는데 설계 당시 7층인지 9층인지 여러 의견이 있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9층으로 나와 복원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7층인지 9층인지 여러 설이 있었으나 복원을 더 미룰수가 없어 석제로만 쌓아서 탑을 세웠는데

이번에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 중앙에 역 삼각형의 큰 돌이 있었으며 그  사이로 작은 돌과 자갈 흙을 채워 석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공법이 1,400년을 견디게 했는데 복원된 동탑은 쌓는 공법이 서탑과 틀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

당간지주

서탑의 복원은 많은 고민을 가져다 준다.

현대 기술로 중앙에 흙을 다져넣고 어떻게 탑을 쌓을 것이며 과연 그 탑이 1,000년 이상을 견딜것인지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빛났다.

앞쪽으로 나오니 당간석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과연 가람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더 앞쪽은 연못이 있으며 전체적인 가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면적에 당시의 절대권력의 힘과 재력의 정도를 충분히 가름 할 수 있었다.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향가이다.

원문은 아래와같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선화공주주은 타밀지가량치고 서동방을야의란을포견거여)

 

善化公主主隱(선화 공주니믄) - 선화 공주님은他密只嫁良置古(남 그스지 얼어두고) - 남몰래 (맛둥을)사귀어두고

薯童房乙(맛둥바을) - 맛둥 도령을夜矣卯抱古去如(바매 몰 안고가다) - 밤에 몰래 만나러 간다네

(양주동님이 해석한 '서동요'의 원문입니다.)

 

 

나의 생각도 아래와 같음을 연합뉴스 기사로 갈음한다.

 

 

미륵사에 선화공주 연결짓지 마라"김상현 교수 "창건주체는 왕비 사택씨"
불교사상사 전공인 동국대 김상현(金相鉉.62) 교수가 최근 발굴된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 창건은 백제 무왕(武王)의 정비인 사택(沙宅)씨의 발원으로 시작됐다는 명백한 내용이 보임에도

이를 부정하면서 여전히 신라 출신 선화공주와 연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김 교수는 14일 한국사상사학회 주최 월례발표회에 내놓을 논문 '백제 무왕의 왕후와 미륵사 창건(삼국유사 무왕 조의 사료비판을 중심으로)'에서 미륵사 창건주체가 선화공주(삼국유사)와 백제왕후 사택씨(봉안기)로 각각 다르게 기록된 자료 중 "봉안기를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해답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12일 주최 측이 미리 배포한 이 논문에서 김 교수는 "봉안기와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13세기에 와서야 문헌으로 정착된 삼국유사보다는 미륵사를 창건하던 당시에 백제인들이 남긴 봉안기에 신뢰성을 두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봉안기가 발견된 이후에도 여전히 선화공주가 왕비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적지 않은 것 같다"면서 삼국유사 무왕 조에 기록된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설화로서의 의미는 적지 않겠지만 이를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한 과부가 못에 사는 용(龍)과 관계해 서동을 낳았다든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예쁘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이 그를 유혹하러 신라 서울로 갔다는 기록, 아이들이 부른 노래에 의한 소문만 듣고 진평왕이 선화를 궁중에서 내친 일 따위를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겠느냐고 반문했다.

나아가 김 교수는 중원(中院)ㆍ동원(東院)ㆍ서원(西院) 등 미륵사의 삼원(三院) 구조를 분리해, 그 중 일부는 선화공주가 발원해 세우고, 다른 곳은 봉안기에 보이는 백제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 창건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학계 일각의 주장도 "미륵사 삼원은 창건 당시의 디자인"이라는 발굴조사단의 견해를 참고하면 타당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항간에 삼국유사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면서 "봉안기의 출현으로 인해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가 크게 손상되거나 혹은 평가절하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삼국유사가 소중한 만큼 그 장점과 한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같은 학술대회 다른 발표문 또한 비판하는 셈이 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 박사는 미륵사 창건주체를 백제왕후 사택씨와 선화공주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견해를 담은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13.4.6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