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통영 소식

원균 묘소가 사라진다.

청풍헌 2014. 8. 24. 21:53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의 신화를 쓰고 있다더불어 이순신 열풍이 불어 관련 서적 및 단체가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더불어 한산대첩도 인기리에 끝났다이번 한산대첩 기간 난중일기에 대한 세미나를 열어 열화와 같은 호응으로 성황리에 끝났다이순신 연구소에서 주관을 했었는데 흡족해 하셨다기라성 같은 이순신 학자들이 통영을 방문 하시어 여러 곳을 답사했다그중 한곳인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원균이 죽었다는 춘원포를 답사 후 이배사 카페에 후기를 올리신 방진님의 글을 읽고 느낀바가 있어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패장(敗將)일지언정 역적(逆賊)은 아니지 않는가.

춘원마을을 방문하고 나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이 혼미하다. 원균이 아무리 스스로 도망쳤던 겁장(怯將)이었고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패장(敗將)이었다 해도 한편으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운 용장(勇將)이었고 함께 전과를 올린 승장(勝將)이었다. 아무리 이순신과 갈등관계를 빚었다 해도 원균 역시 자신의 소신대로 나라를 지키려했던 애국의 장수임도 분명하다. 조국을 수호하다 원수의 칼날에 죽임을 당한 원균을 승장이 아니라고 해서 역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춘원마을 원균의 묘지 앞에서 문득 이순신의 유해를 3일간 안치했던 남해의 충렬사가 떠올랐다. 십일 정도 안장했던 고금도 충무사와 월송대도 떠올랐다. 승자의 최후와 패자의 최후를 우리는 굿가이 뱃가이로 지나치게 매김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원균의 후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벌초를 해달라는 후손들은 다 어디에 있으며, 원균 명장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으며,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의 후손인 대제학 이식(李植)이 편찬을 주도했기 때문에 원균이 지나치게 폄하되었다고 떠드는 이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비록 논란이 있다 해도 원균 역시 엄연히 국가가 공훈을 책봉한 선무일등공신이 아닌가, 원균이 죽어서 이순신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승장은 승장대로 공로를 평가하고 패장은 패장대로 교훈을 얻어내면 그것이 자랑스러운 우리들 후손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Black Tourism, 마땅히 초석이라도 세우자.

만일 이순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굿가이 뱃가이 전략을 펼치고 있다면 두 사람 모두 조국을 수호했던 애국의 장수였음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배우고, 실패에서 성공을 배운다면 우리는 원균으로부터도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춘원마을, 비극의 현장을 보존함으로써 교훈의 역사로 되새겨야할 일이다. 불편한 진실의 장소를 유적지화 하는 것도 역사적 품위와 교육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역사를 사랑하고 이순신을 숭모하고 통제영을 자랑하는 통영시가 해야 할 역할이다. 아픈 역사를 발판으로 삼는 일, 즉 거제시가 조선수군의 무덤이었던 칠천량을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명소로 삼았다면, 통영시도 수군통제사의 무덤이었던 추원포를 블랙투어리즘(Black Tourism)의 명소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흠뻑 적셔주었던 교황 프란치스코가 45일 동안 남기신 말씀 중에 가장 많은 단어는 사랑이었다.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굿가이도 뱃가이도...... 

이배사 방진 칼럼방에서


벳가이와 굿가이로 대별되는 이순신과 원균을 비교 하신 글에서 원균의 묘라는 곳을 보시고 비애를 느끼셨는지 안타까워 하셨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실패한 역사도 역사다. 지우고 모른 체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몇 해 전 칠천량 해전을 재조명한 논문을 발표하신 소장님께서 원균 묘소를 추적하여 발표 하셨다. 이후 테러 수준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셨다.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다. 역사는 역사로 봐야할 것이다. 무조건 영웅화 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인양 강요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이순신과는 원흉(元兇)이라고 지칭할 만큼 사이가 나빴던 원균이지만 나라를 위하여 전투를 하다가 적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역사는 기록한자의 몫이라 했던가? 우리는 너무 한사람의 영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한사람의 힘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의 경우가 복합적으로 형성되고 융합되어 역사가 이루어진다. 왜란 중에는 원균이란 역사의 인물도 있다. 이순신의 대척점에 섰다고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


지난 통영별로를 걸으며 경기도 평택에서 원균묘소를 참배했다. 참배라기보다는 그냥 가보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사당이 있고 묘가 있으며 무인석이 세워져 있는데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과연 선무1등공신의 장군 묘소인지 의문이 들었다. 원균의 최후는 선전관 김식이 자세히 보고한 내용이 선조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고성 추원포로 물러나 도망가다가 원균은 늙어 달아나지 못하고 소나무 아래 앉았는데 왜적 6~7명이 칼을 들고 달려들어 원균이 있는 곳까지 왔으며 생사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원균의 묘소로 추정되는 이곳은 오래전에 내려오는 전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원균의 묘가 맞을 개연성이 있다. 혹은 묘가 아니라도 전몰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실패한 역사를 교훈삼아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웃 거제에는 전쟁의 참상을 겪은 포로수용소를 테마파크로 개발하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칠천량 패전공원도 조성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균이 상륙하여 죽은 이곳도 잘 조성하여 실패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곳이 곧 4차선 도로에 편입될 것이라는 한다. 지금은 구전에만 전해오는 원균의 묘라 하여 아무런 표식도 없으며 더군다나 발굴은 커녕 누구하나 관심 가지는 이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 공사가 시작되면 여지없이 밀어버릴 이곳이 또다시 잊혀진 역사가 될까 두렵다.  


2014.8.24. 백세청풍 김용재


▲잡초만 무성한 원균묘 추정지


▲추정 위치

▲칡넝굴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택의 원균묘소(가묘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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