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일상의 생각

(스크랩) 길, 그 속엔 삶과 사람이 있다.

청풍헌 2015. 1. 24. 07:19
길, 그 속엔 삶과 사람이 있다.

길, 그 속엔 삶과 사람이 있다.

   

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나는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태어나면서부터 나는 길 위에 있었고지금도 역시 길 위에 있다. ‘길도 집이고, ‘집도 길이라고 깨달은 순간부터 내 마음은 맑고 청량한 교외에 나간 것과 같이 홀가분해졌다고 할까그런데 금세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길 위에서 나를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시간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싶어 허전할 때가 많다.

그러한 사실을 절감한 뒤부터 순간순간이 마치 천금千金이나 된 듯이 소중해졌고불현 듯 불쑥 길로 나가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휴일에는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방에서 리모컨이나 이리 저리 누르면서 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마음을 열고 길을 나서는 순간나를 반기는 놀랄만한 것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길을 나서면 도처가 박물관이고도서관이며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들이다돌멩이 하나나무 한 그루풀 한포기에 스민 세월과 함축된 수많은 사상그러한 것들이 도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길 위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리라.

보행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나는 한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담긴다들판의 모습이어지는 상쾌한 정경들대기대단한 식욕걸으면서 내가 얻게 되는 건강술집에서의 자유로움내가 무엇엔가 매여 있다고 느끼게 하는 모든 것나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그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청소해주고 내게 보다 크게 생각할 수 있는 대담성을 부여해주고 존재들의 광대한 속에 나를 던져 넣어 내 기분 내키는 대로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그것들을 조합하고 선택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장 자크 루소의 글이다.

 

지당한 말이다그런데 그 말을 이해하고 걷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어느 때부턴가 유행하기 시작한 <길 위의 인문학>이 아직도 탁상공론에만 머무는 까닭이다.

천천히 걸으면 보이는 것들기적처럼 나타나 지친 내 영혼에 향기를 불어 넣어주는 수많은 것들이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며 길을 나설 때 꼭 가져가는 필수품그것이 바로 카메라다.

 

사진을 잘 찍는 법, 

사진작가도 아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 된다카메라가 좋은 것도 아니고그렇다고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그저 순간을 포착하여 찍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 사진을 찍는 사람그러다가 어느 때부터 가장 표준형인 캐논 5D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30여년 전만해도 좋은 카메라만 들고 다녀도 사진작가라고 여겨서 선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스마트폰을 소유한 사진작가다 보니 카메라도사진도그리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자기 사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진들을 찍는데사진을 배우지만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카메라 조작법에 대한 것만 배울 줄 알지 인문학적인 사진 이야기를 사진작가를 통해서 들을 시간이 없어서 사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미미하다.

얼마 전 답사를 가서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떠오른 소설이 바로 이청준 선생의 중편소설인 <시간의 문>이었다.

주인공 유종열씨는 사진기자였고 사진작가로 살다가 어느 날 동남아의 난민선을 찍다가 바다에서 실종되고 만다그는 언제나 카메라를 누르는 순간에 대상의 흐름이 정지해버린다고 낭패하던 사람이다. ‘시간의 문을 지나 흘러야 하는데그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과 대상 사이의 거리그 공간의 벽이라고 여겼다. ‘그 공간의 두꺼운 벽 때문에 대상의 시간은 렌즈가 열리고 닫히는 순간에 늘 순간으로 정지해 버린다.‘고 여겼던 유종열이라는 이름의 사진작가.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대상과 나언제나 둘은 그런 관계지둘 사이엔 엄청난 벽이 있거든,, 그래바로 그 거리의 벽이에요그 두꺼운 거리의 벽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참으로 엄청난 카메라의 숙명이지그 거리가 사라져 주지 않는 한 우린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어요벽을 뚫고 넘어가 함께 있거나 같은 시간의 흐름을 탈 수는 없어요그런데 대상의 시간을 찍는다는 것은 그저 그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문제는 결국 이 놈의 지워지지 않는 거리와 공간인데.“

 

다시 펼쳐본 <시간의 문>을 다시 읽고 방 안 귀퉁이에 놓인 카메라를 바라다본다나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많은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

내가 바라본 그 사물들의 영혼靈魂이나 정수가 사진 속에 제대로 들어 있기나 한 것일까?

百聞而不如一이라고 많이 찍는 사람 당할 수 없으며대상과 공감하는 정도에 따라 사진이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의 사진작가인 윤광준의 사진에 대한 생각인데사진을 잘 모르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카메라가 좋아야 다른 사람의 카메라에 주눅 들지 않는다그러므로 카메라가 좋아야 하고자동으로 놓고 찍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어설픈 사진 실력을 가지고 수동으로 찍다가 보면 자동만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미엘은 어떠한 경관도 마음이다.” 라고 말했는데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좋은 사진 역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고,‘ 그래서 어느 순간 시간의 문이 열리고 흐르는 시간이 있을 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라서 그런지 몰라도 망설이기를 잘한다는 것이다지금도 아깝게 생각하는 것경상도 모 비구니들만 사는 절에 갔을 때들어가지 말라는 곳으로 갔다그런데 빨래 줄에 여스님들의 내의(앞가리개수백 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그대로 두고 나왔는데나중에 사진작가들에게 들은 얘기 쪽팔림은 잠시이고 사진은 영원하다” 바꿔 말하면 망설임은 잠시이고 사진은 영원하다가 맞은데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다.

 

글ㅇ르 써서 먹고 사는 일, 

그렇다면 내가 매일 쓰는 글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꿈은 작가였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 꿈 외엔 다른 꿈을 꾼 적이 없다그것도 그냥 글만을 쓰는 작가가 아니고글을 써서 먹고 사는 작가가 되길 꿈꾸었다오랜 나날이 흘러서야 그 꿈이 이루어져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작가가 되었지만 이 땅에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도 글을 써서 번 돈은 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시蘇詩(소동파)에 글을 팔아서 먹고 산다(本寶文爲活)”하였고밭이 없어서 깨진 벼루로 먹고 산다.(無田食破硯라고 하였다.

 

대체로 옛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본래 세상에 쓰고자 한 것이지만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몸을 길러갈 재료를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풍습은 뛰어난 재주(才華)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지금 현존한 사람으로서 차천로車天輅.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글을 지어도 일전一錢도 벌지를 못하여 항상 밥이 부족한 한탄이 있으니비록 깨진 벼루 가 있은들 어찌 먹을 수가 있겠는가나는 그것을 슬퍼한다.“

허균의 동서이자 문장가였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린 글이다.

 

예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글을 써서 인세를 받아서 산다는 것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글이라는 것이 세상에 고루 쓰이면서도 길이 남을 글은 더욱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렵고그저 편하게 가려운 데를 그것도 조금씩 긁어주는 글만 사랑을 받는 세상이니,

시인도소설가도나 같은 인문학자도 마찬가지로 글을 써서 먹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하물며 조선 중기에는 말해 무엇 하랴,

하지만 그때는 글을 쓴다는 자부심이라도 있었고세상이 뭐라 해도 내 길만 가겠다는 사명감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글을 썼다.

 

<오만과 편견>을 지은 제인 오스틴은 작가作家로서의 삶을 아주 가는 붓으로 작업을 하여 많은 노동을 한 뒤에도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아주 작은(5cm의 폭상아라는 말로 겸손하면서도 아주 고상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했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어떤 기자는 스스로를 집필노동자라고 표현했는데나는 나 스스로를 한글 스물 넉자를 가지고 하루 종일 놀면서도 싫증이 나지 않는 문자조립공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2006년에 모 신문에서는 당시 직업을 가지지 않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인문학자들을 열 사람 정도 꼽았었다그 때 나와 같이 인문학으로 글을 써서 살아가는 사람을 인디라이터독립저술가라고 평하였다.

글을 쓰는 것도 힘든 노동의 일종이고그래서 노동자라는 말은 합당한 것 같지만 나와 같은 글을 끄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라그 대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세상으로 나가라해적도 되어 보고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러시아(소련)의 노동자도 되어 보라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기본적인 생리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어려운 활동에 전념해보라.“

 

모든 것을 체험해보고 부딪쳐보고서 글을 쓰라는 러셀의 말은 맞는 말이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라고 이상이 말했던 것처럼 힘든 노동을 통해서 세상의 여러 면을 경험해볼 것을 제안한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항상 불공평한 것이라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글을 쓰는 일이 더 그렇다그래서 마르크스의 말은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하다.

 

피고용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굴러가게 하기 위해 치는 기름과 같다노동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돈은 세상의 그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 ‘돈 가지고 안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라는 말이 회자 될 만큼 우리는 돈이 가장 우선인 시대에 살고 있다하지만어디 돈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했던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소크라테스다.

 

나는 제자들에게 밥과 마실 거리그리고 노동의 양을 자신의 내면 수준에 적합하게 조정하라고 가르쳤다적합한 수준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주치의를 둔 셈이다.”

 

결국 크게 욕심 내지 말고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도 말고세상 모든 것과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라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삶인가그 해답을 <탈무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현재의 그릇인 몸을 열심히 사용하라내일이면 깨질지 모르니

 

답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다많이 읽고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다 가는 것그것만이 잠시 살다가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일 것이고그러한 삶에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런데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강변하는 한 편에서는 인문학의 위기‘ 라는 말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상이 항상 균형 속에서 불균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균형이나 정도正道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 라는 명구를 남긴 키츠의 글이 의미심장한 연유다. “세상은 내게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고 어렵고아무리 실용학문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할지라도 문학역사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든든한 기초를 제공하고 굳건하게 서 있어야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화수분 같은 것이 아닐까?

 

을미년 일월 스무나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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