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45회 토요걷기(통영성 9정) 통영성의 아홉 개의 옛 새미를 아시나요?

청풍헌 2015. 2. 1. 20:46

통영성의 아홉 개의 옛 새미를 아시나요?

작년 연말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하여 매우 침체 되었다. 정기총회를 계기로 심기일전하여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통영을 본격적으로 알아가는 계기가 된 통영성안의 옛 우물 찾기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자료를 찾고 보충하여 사전 답사를 하여 을미년 새해 첫걸음으로 나서게 되었다. 토요걷기가 어느 듯 45회째인데 할 때 마다 긴장되기는 매 한가지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지, 회원님들은 몇 명이나 오실까? 탐방 동선은 최적일까? 등등... 그래 좋아서 하는 일이고 하든대로 하자고 마음먹으니 오히려 편안했다


통영성은 1604년 이경준 통제사가 이곳에 통제영을 연 이후 74년만인 1678년 윤천뢰 통제사 때 축성했는데 이는 삼도수군통제영을 보호하는 방위개념의 성이다. 읍성도 아니요, 진성도 아니요, 산성도 아닌 통제영 본영을 수호하는 통제영성이다. 성곽은 방위개념으로 축성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식량과 식수다. 식량은 비축을 하면 되지만 물은 수원지의 확보가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통영성도 마찬가지 이치다. 성내에는 세 곳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통영지에 전한다. 그러면 과연 9개의 우물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존재 하는지? 또 위치의 근거는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3년 전 한산신문의 정용재 기자에게 소스를 받아 북문 안 새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 통영 성안에 옛 우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자료를 찾아보니 세 곳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이 존재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렴풋한 기억과 동네 어른들의 조언으로 하나하나 추적해 보니 5개는 찾았으며 4개는 위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치도 정확한 사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전에 의한 것이었다. 2014년 진주 박물관에서 통영특별전을 했는데 당시에 구입한 도록(圖錄)에 지도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남해지도다. 그곳에 통영성내의 각종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고 더불어 우물까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지도를 확대하여 현존하는 우물과 비교 검토를 했다. 옛길을 더듬으며 아홉 개의 옛 우물을 찾고자 길을 나섰다


▲24명이 힘차게 출발

▲통영지 성조편

▲남해지도1

▲남해지도2


북문내로변정北門內路邊井1,2

세병관의 망일루 앞에서 24명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운주당 아랫길을 따라 북문 아래새미(북문내로변정)로 향했다. 통영성 탐방 코스에 포함된 곳으로 수차례 탐방을 했었던 곳이다. 우물의 벽면에는 “19117월 김덕보가 새로 우물을 팠으며 동장은 허완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신해칠월일김덕보축건시동장허완수(辛亥七月日金德甫築建時洞長許完秀) 당초 우물 위에는 샌드위치 패널이 덮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악취가 진동하고 온갖 오물이 들어있어 시청에 수정을 요청 했었는데 스텐 판으로 역시 우물을 밀폐 시키고 열쇠를 채워 이곳이 우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해 놓았다. 북문 바깥새미는 도로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북문아래새미

▲사라진 북문 윗새미(사진 김일룡 원장님)

▲네이버 지도


신상지변정新上池邊井3

다시 토성고개를 넘어오면 포교당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곳이 옛 영리청 건물을 법륜사가 사찰로 이용하던 곳이다. 그 포교당 팻말 앞이 못 새미(신상지변정)이다. 이곳은 4차선 도로 확장공사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민방위 사업으로 비상식수 공사를 하면서 우물을 없앴다. 못 새미는 도로 건너편에 운주당지(연못)가 있어 못 새미로 불렀다. 원형은 팔각형의 둘레돌로 쌓였으며 가뭄에도 좀체 마르지 않는 우물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 했다


▲못새미(사진 김일룡 원장님)

▲네이버 지도

▲못새미 위치


동부로변정東部路邊井4

길을 건너 신상동에서 동부동으로 내려오는 길을 들어서면 아직 고택이 보인다. 솟을 대문이 현존하는 옛 대로길인데 지금은 형편없는 소롯길이다. 신상동에서 동부동으로 내려와 만나는 교차 지점 어디에 우물이 표시되어 있다. 그곳은 건물이 들어서 어딘지 알 수 없다. 차후 계기가 되어 유적 발굴 조사를 하면 나올 것이다


▲사라진 동부로변정


주전동정鑄錢洞井5

여기서 동문고개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주전(鑄錢)골이 나온다. 주전골은 화폐 즉 엽전을 만들던 곳이다. 옛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사시에 상평통보 뭉치와 도가니가 출토 되었다고 한다.(김일룡 원장님 증언) 또 이곳이 대밭으로 장인들이 살았으며 김용식, 용익의 생가 기념관이 있으며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 화백의 생가터도 있다, 이곳에도 역시 민방위 비상 급수시설이 있으며 옆에는 우물정자()의 둘레돌이 남아있는 큰 우물이 주전동정이다. 이 우물의 철판뚜껑을 들어 올리니 크기가 지름이 어림잡아 2.5m 정도이며 깊이는 대략 8~10m 정도로 지금도 양수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우물은 사연이 있는데 원장님에게 어느날 전화가 한통 걸려와 이 우물을 공사하면서 메울려 한다는 제보가 왔었다. 제보자는 통영 향토사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이 우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원장님에게 연락을 했었다. 즉시 달려와 우물을 파괴하는 것을 막아 지금 이 우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배워야 알 수 있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보존할 수 있다. 지금은 우물 앞에 원룸이 들어서 잘 찾을 수 없을 만큼 건물 속으로 숨었다


▲주전골 새미

▲네이버 지도


하동문로변정下東門路邊井6

다시 나왔던 길로 되돌아 나오면 동피랑 입구가 나온다. 입구의 울라봉 카페는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젊은이들에게 유명한 이유는 쌍욕라떼다. 본인에게 하는 쌍욕라떼를 먹기 위하여 긴 줄을 서고 대기자 명단을 작성하여 길가에서 기다린다. 왜 사람들은 자기에게 욕을 하는 것을 즐길까? 그런 욕을 듣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린다. 한편으로 재미있으면서 기억에 오래 남으니까 그런 것 같다. 이 근처가 동문 아래새미(하동문로변정)가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는 두 개의 새미가 존재한다. 현재 동피랑 올라가는 입구의 길에 있었던 새미는 사라졌으며 주택가에 있던 새미는 살아남아 지금도 맑은 물을 내뿜고 있다. 우물 주변에 각종 자재나 물건들을 방치 했었으나 지금은 뚜껑을 달고 펜스를 쳐 제법 깔끔하게 정비 되었다. 이곳도 지도와 대조해 보면 정확히 일치한다


▲동문아래새미

▲네이버 지도


통세미

다시 샛길로 나오면 동암문으로 가는 소방도로와 합류한다. 합류되는 지점이 청마가 유연시절 살던 집이다. 동암문을 나오면 옛 장시 중 미전(쌀가게)이 열렸던 장시다. 지금은 도로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옛 지도에는 네 곳의 장배(거제, 사천, 하동, 창원)가 있던 부둣가였다. 다시 송정동으로 발길을 돌리면 통새미가 나온다, 과거 이곳에서 통을 만들던 곳이라 통새미라 불렸으며 새미 둘레돌을 복원하여 동피랑을 오르는 사람들은 맞이하고 있다. 남문성(청남루)을 향하여 오면 장배가 닿던 곳에도 우물 표시가 있으나 지금은 어딘지 알 수 없다. 중앙시장을 지나 큰 도로를 건너 청마거리의 쌈지공원에서 가져온 차를 마시며 담소했다


▲통새미


남문내인가중南門內人家中7

발굴중인 남문지에 도착하니 1차 발굴지는 복토를 했으며 2차 발굴지를 발굴 하고 있었다. 통상 우리가 남문터라고 알고 있었던 지점이다. 이곳 어딘가에 남문 안 새미(남문내인가중)가 있었다는데 아리송했다. 1차 발굴지에서 두 개의 새미가 발굴 되었으나 폭이 좁고 시멘트 관으로 묻혀있어 옛 우물이 아니다. 그러면 민가의 어디에 있었을 것이다. 현 중앙식당 아랫집 마당에 있었다는 우물일 가능성이 농후하여 다시 찾았다. 이 집은 일제 강점기 여관을 하던 집으로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왔던 통영사람들이 이곳 여관에서 잠을 잣다는 증언이 있었다. 지금도 적산가옥으로 되어 있으며 도시계획상 도로가 날것이라 한다. 이곳에 큰 우물이 있었다고 이곳에 살고(40)계신 집사님이 이야기해 주었다. 근처 서피랑 사람들은 이 우물을 길러 먹었다. 가물 때는 이 물을 리어카에 싣고 물장사를 했었다고 한다. 근처에 우물은 은성상회와 이곳 우물밖에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철근을 깔고 콘크리트를 덮고 파이프를 심어 놓았다. 즉 새미는 함부로 없애지 못하며 반드시 숨을 쉬도록 숨구멍을 틔워 놓아야 했다. 이곳은 물이 흔하여 새미만 파면 물이 나와 근처 충무 목욕탕도 장사를 잘 했다고 한다. 실제 발굴 조사 중인 남문터에는 벌써 3개의 우물이 발견 되었다. 대부분 후대(일제 강점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도

▲추정 위치


동락로변정東樂路邊井8

세병관 쪽으로 오르면 대부분 건물은 철거되고 마지막 은성상회 건물만 남았다. 지도에는 벅수 앞에 우물이 존재했다. 현재 벅수는 도로에 편입되면서 위쪽으로 옮겨 세웠으며 원래 위치는 신라누비 앞이다. 맞은편이 은성상회이며 이 건물 안에 우물이 있다. 지난번 사전 답사 때 주인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우물을 보았다. 과거에는 우물 둘레돌도 있었으며 웬만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중앙동 사람들이 물을 길으러 왔다. 이후 충무 목욕탕이 들어서며 지하수를 파서 끌어 쓰는 바람에 물이 말랐다. 그래도 우물을 메울 수 없어 철판으로 뚜껑을 덮고 숨구멍을 틔워 놓았다. 원장님과 함께 한번 보고 싶다고 했으나 장날에 오라하여 답사를 하지 못했다. 이곳도 보상이 끝나면 허물 것이다. 허물기 전에 발굴 보존하여 복원하면 좋은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조선시대 우물이 위기에 봉착 했다. 즉 동락로변정이다


▲네이버 지도

▲은성상회

▲박석골 새미


서구상로변정西舊上路邊井9

발걸음을 관창골 새미(서구상로변정)로 옮겼다. 비교적 원형이 남아 있으며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용왕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으며 통영청년단회관 아래에 있다. 이곳도 나무로 뚜껑을 막아 놓고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관창골 새미

▲네이버 지도


통영성내의 아홉개의 우물을 옛 지도를 보며 탐방한 결과 동부로변정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북문 윗새미도 도로에 편입되어 옛 어른들의 기억속과 사진으로 남았다, 또한 못새미(신상지변정)도 도로와 상관없이 없애버리고 사진으로만 남았다. 또한 남문 안새미도 원형이 홰손되고 지금은 우물이 덮여 짐작만 할 뿐이다. 통영의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 통영성내 아홉 개의 우물을 찾아 탐방했으며 우물의 본래 기능을 살리고 안전하게 볼 수 있도록 개선하고 안내판과 걷는 코스를 개발하여 스토리텔링 했으면 한다.



2015.1.24.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