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46회 토요걷기(통영벅수)거리(巨里)밥 먹고 있는 통영의 벅수를 만나다.

청풍헌 2015. 3. 7. 21:36

300년 통제영의 군영에다 100여년의 수산업이 번성했던 도시 통영은 바다의 땅이다. 농사나

짐승도 자연재해에는 속수무책이었지만 특히 바다는 순전히 용왕님의 처분에 맡겨진 신세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게다. 인위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무엇에 매달린다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 바닷가 일을 나가는 어민들은 정월 보름께 용왕제를 한다

즉 용왕 먹인다고 하는데 이는 생선이 많이 잡히도록 간절히 바라고 또한 무사 안위를 비는 행위다

한 때 미신이라는 미명아래 많은 현상이 사라졌지만 어촌에는 많은 동제와 용왕제 산신제가 남아있다

지금도 징소리가 나는 바닷가에는 용왕제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남해안별신굿의 원형이 살아있는 죽도가 있으며 한 때 각 방송국에서 앞 다투어 취재를 했던 삼덕리 마을 제당에도 벅수가 남아있다

벅수! 장승! 민간신앙의 모태인 벅수와 장승이 우리고장 어디에 있을까?

나무나 돌로 만든 기둥모양의 몸통 위쪽에 신이나 장군의 얼굴을 새기고 몸통에는 역할을 나타내는 글을 써서 세우는 신상(神像)으로 위협적인 수호신장(守護神將)이거나 진압신(鎭壓神) 또는 노신(路神) 등의 기능을 가진 민속신앙의 대상인 주물(呪物)” 이라고 정의한다

김두하의 장승과 벅수에서는 벅수는 부락수호나 바위수호를 맡은 법수(法首)=선인(仙人)이 변하여 벅수가 되었다고 추론했다

또한 장승은 장생에서 온 말로 국가사찰이나 왕의 안녕을 비는 비보(裨補)의 의미를 지닌 장생표에서 유래 했으며 

이후 관로나 군로마다 세운 노표(路標)에도 역귀를 쫒아내는 역할을 했던 것 에서 유래한다 했다

많은 변천에 의하여 지금은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벅수다, 장승이다 라고 구분 짓기가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래도 다른 도시보다 비교적 원형이 살아있는 통영의 벅수를 찾아보자


▲기념촬영

▲출토당시의 모습

▲오방색 깃발을 세워 놓았다.

세병관 석인

가장 최근에 발굴된 세병관 경내에 있는 석인은 통제영 복원 작업 시 세병관 석축을 공사 하면서 석축 뒤채움 사석으로 발굴되었다

목과 허리가 잘린 채로 수년 동안 흙속에서 숨죽이며 있던 벅수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통영지(統營志) 공해(公廨)편에 석인(石人)을 강희 40(1701년 신사)에 유성추 통제사가 세웠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발견된 5기의 석인은 각각 모양과 돌의 재질이 다르며 심지어 제주의 돌하루방과 유사한 석인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두 손을 읍()하고 있으며 아래위로 구멍이 뚫려있다. 4기는 원형대로 복원 했으며 한기는 몸통 아래 부분만 남아있다

제대로 된 연구도 없이 추론으로 오방신장(五方神將)이라 하여 각 방위에 해당하는 깃발을 세워 놓았다

오방은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다섯 방위로 나누며 각 방위별로 고유의 색이 있다

일체 만물은 양과 음에 의하여 생성 소멸하고 목, , , , 수 오행 상호간의 작용에 의하여 길흉, 화복이 생긴다는 설이다

즉 동쪽은 청색으로 목성이며 청룡의 의미다. 서쪽은 백색으로 금성으로 백로의 의미다. 남쪽은 적색으로 화성에 속하며 주작이며

북쪽은 흑색이며 수성이고 현무를 뜻한다. 중앙은 황색이며 광명을 상징하는 양기를 뜻한다


▲서문고개를 바라보고 있는 벅수

▲채색벅수

▲벅수 잇빨를 새면 벅수가 된다고...

▲벅수의 제작년대

통영문화동벅수

1872년에 제작된 통영지도가 향토역사관 입구에 전시 되어있다. 지도를 자세히 관찰하면 벅수가 표시되어있다

세병관으로 오르는 입구와 세병관 뜰 및 동파수, 서파수와 착량교 양쪽에 표기되어있다

지도에 표기된 장승은 당시 목장승으로 판단되며 문화동 벅수는 제작연대가 명확히 기록되어있는 지방문화재다

지도에 표기된 장승(1872)과 현 벅수(1906)는 다르다. 통영문화동 벅수는 중요민속자료7호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위쪽으로 이전했다

이 벅수는 동남방의 허한 기를 막기 위하여 세운 비보(裨補)장승이다

벅수가 바라보는 방향은 서문고개를 보고 있는데 저곳이 여황산 능선으로 내려오다 잘록한 곳으로 기가 허하고 건너편의 천함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규봉(窺峰 도둑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하여 세운 벅수다

특이하게 탕건을 쓰고 있으며 칠을 했고 벅수의 앞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을 뒤편에 광무십년병오팔월일동락동립(光武十年丙午八月日同樂洞立)이라 새겨 놓았다. 즉 동남방의 허한 기를 막기 위하여 토지대장군을 19068월에 세웠다

또한 원래 장승은 나무를 깍아 세웠는데 몇 년 후에 계속 만들어 세워야 하고 또 만든 사람이 잘못하면 해를 당한다 하여 

꺼려했는데 돌을 다듬어 세우기 시작했다.


▲명정고개 벅수

▲할배벅수 아래의 구멍(세병관 벅수와 비교)

▲옛길에 대하여 설명중인 김상현 기자

명정고개 벅수

명정고개마루에 있는 돌벅수 한 쌍은 이 길이 옛길임을 증명하는 지표다

최근 세병관에서 발굴된 돌벅수(석인)와 유사한 점이 있다

손을 앞으로 읍() 해 있는 모양과 아래 부분에 구멍이 있는 것은 유사하다

명정고개 벅수는 도로공사 때 1기가 분실 되어 똑같은 형태로 1기를 세웠는데 최근 머리가 파손된 채로 발견되어 그 뒤쪽에 세워 놓았다

새 장가 간 할배벅수를 바라보고 있는 할매벅수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진다

통제영을 열 당시 육지로 오는 길이 아직 없어 마구촌까지 말을 타고 와서 그곳에 말을 매어놓고 구루지 끄트머리로 나룻선으로 건네 

이곳 명정고개를 넘어 통제영으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금줄과 명태 그리고 막걸리

▲기목나무 목장승

▲장승의 기를 받아 무사 안녕을 빌어본다.

▲신목의 표지모델 우포신목은 수명을 다하고...

우럭개 장승

우럭개는 우럭조개가 많이 잡혀서 우룩개라 했는데 한자지명으로 우억포(右億浦)라 하다가 우포로 변했다는 설과 

이곳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고성에서 건너왔는데 오른쪽에 있다하여 우포(右浦) 왼쪽에 있다하여 좌진포(左鎭浦)라 하는 설이 있다

우포는 통제영 초기에 중요한 통로였다. 현재의 도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천이나 고성에서 통제영으로 오는 가장 빠른 길을 이곳 우포로 와서 명정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지름길이다

고성, 사천에서 오는 각종 물산과 세곡들이 우럭개를 통해서 대평으로 명정 고개로 넘어 통제영을 넘나들었던 곳으로 이곳에 목장승이 남아 있다

목장승은 기목나무로 현존하는 오래된 목장승 중 가장 잘 생긴 장승으로 가치가 있다. 원형을 보존하여 박물관에 보관해야 할 문화재이다

코와 턱 그리고 수염이 살아있는 낡았지만 우리 조상들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다

보름을 코앞에 두고 장승 앞에는 금줄과 거리(巨里)밥이 차려져있다. 매년 방문 하지만 나날이 비바람에 낡아 가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순철의 통영의 신목표지모델이었던 우포의 신목은 그 수명을 다하고 어린 자식에게 소임을 넘겼다

오래된 마을의 증표가 동네 가운데에 있는 수 백년 묵은 엄나무가 있다.


▲사그라들고 있는 돌벅수

▲돌벅수의 잇빨

▲착량교 돌다리 난간 벅수(채색된 탕건)

▲자세히 살피는 회원들

▲산양면사무소터

착량교 벅수

통영의 산양면은 미륵도인데 물이 들면 섬이요 썰물이 되면 연결되는 이 목을 착량포 또는 굴량포, 굴포량이라 했다

이후 여러 차례 이곳을 매웠다가 다리를 놓기를 반복하다 마지막으로 1896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목을 파고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자주 무너져 융희1(1907) 이 고장의 독지가 김삼주가 사재를 털어 나무다리를 놓고 보수 관리비를 마련하여 관리했다

나무다리는 태풍이나 자연적인 재해로 자주 무너지자 통영성벽을 헐어 다시 돌다리를 19157월에 준공했다

이때 진남군 서면과 산양면민들은 다리를 놓아준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3기의 비석과 하나의 돌장승이 있는데 돌장승은 돌다리 양쪽 난간대 끝단에 있던 것인데 3기는 어디로 사라져 없어지고 1기만 남아서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과거 사진에 이 벅수의 탕건도 검을 채색을 했으나 오랜 세월에 낡고 삭아서 바스러지고 있다

이 벅수 아래 소공원에는 산양면사무소터가 있다. 큰 바위에 새겨진 산양면사무소(山陽面事務所)라는 암각은 이곳이 산양면터 임을 알린다

과거 서면에서 산양면으로 분동을 했는데 산양면의 구역이 평림동, 당동, 미륵도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으므로 이곳이 중심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곳이 통영의 삼일 독립운동의 스토리가 스며있는 곳이다. 격문을 인쇄하기 위하여 통영읍 등사판을 훔쳐내어 산양면으로 가서

산양면사무소 등사판도 가지고 나와 인쇄 작업후 등사판을 갖다 두려다 잠복 대기 중이던 경찰에 체포되고,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 아픔이 있는 곳이다.


▲세포솟대

세포마을 솟대

솟대는 민속신앙에서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마을의 수호신의 상징으로 세운 긴 나무 장대이다

삼한 시대의 소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긴 장대 끝에 나무로 만든 새 조각이 있는 모습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馬韓傳)에 보면 삼한시대에는 각 부락마다 천신에게 제를 지내는 소도(蘇塗)가 있었는데

그 소도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등면 대리마을 뒷산에 천신제를 지내는 소도(蘇塗)가 있으며 지금도 사등면장이 직접 제사를 지낸다.


▲모상벅수 한쌍

▲거리밥상을 받았다.

▲벅수를 살피는 회원들

모상벅수

모상을 옛 사람들은 '개안'이나 '벅수()'이라고 불렀다

흔히 개구석이라고 표현하듯, 모상이 깊숙한 포구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해안도로와 학교 때문에 그 굴곡이 예전만 못하나, 지금보다 더욱 깊숙한 포구였다

'벅수()'은 옛날 마을 입구에 벅수(장승)가 세워져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마을의 입구라도 해도 이제는 학교 뒷편으로 돌아가야 벅수를 만날 수 있다. 예전 나무로 만들었을 벅수는, 이제 돌로 만들어져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계해년(1983) 정월 초열흘날 세워진 모상 벅수는 특이하게 제단을 짚으로 계란 꾸러미처럼 만들어 거리(巨里)밥을 받아먹고 있다.



▲원항벅수

▲관유벅수

▲당포벅수

▲당포성 산책

▲동백

당포벅수

관유의 벅수는 원래 나무였으나 마모가 심하여 최근 돌 벅수를 세웠다고 한다

할배 벅수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고 할매 벅수의 귀를 먹으면 애기 밴 처녀의 애기가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원항벅수는 원()의 목()에 설치한 벅수로서 산신제를 지내고난 후 벅수제를 지낸다

당포벅수는 당포성의 입구에 설치했던 성문수호의 비보장승이다.


▲성형의 부작용으로 앓고 있는 영운리 벅수

영운리벅수

과거 삼천진이 있었던 곳으로 마을의 입구에 액운을 막는 벽사의 역할을 하던 벅수이다

영운초교에서 몇 발짝 내디디면, 일운마을 표지석과 함께 돌벅수 한 쌍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장군 벅수는 얼굴에 성형 수술 후유증으로 팩을 하고 있으며 여장군 벅수는 고뿔이 걸려 입마개를 한 형상이다

왜 이리 됐을까? 원래는 키가 같았지만 마을길을 넓히면서 이동 과정에서 부서지고 깨져서 시멘트 성형수술을 했다

마을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옮겨진 돌벅수, 해안도로를 넓히느라 얼굴과 몸이 손상된 돌벅수...안타까운 현실이다.

 

벅수는 토속신앙의 바로미터다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민속신앙을 한 때 미신이라는 이유로 배척했다

300년 전통의 통제영 신청(神廳)이 있었으며 기생청,  취고수청 등의 명맥이 내려온 무()는 지금도 무형문화재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마을이나 진성(鎭城)의 허한 기()를 보()하고 안녕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벅수로 전해진다

우리가 지켜온 400년 전통문화가 잘 계승되기를 바래본다.


2015.2.28 통영의 벅수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