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충렬사 어제기판(御製記板)

청풍헌 2015. 10. 8. 05:59



충렬사 어제기판(御製記板)

충렬사 정침 서쪽 문 위에 걸려 있는 이 어제기판 편액은 정조 19(1795) 정조대왕께서 내려주신 사제문과 따로 통제사에게 하명하신 바를 이득제 통제사가 해서로 써서 목판에 세겨 놓은 것이다. 가로 140cm, 세로 70cm 크기의 목판 바탕을 검은 색으로 칠하고 글씨를 음각한 후 흰색으로 메웠는데 글씨가 단정 하면서도 웅혼하다. 너비 8cm의 목판으로 45˚  각도의 테를 두르고 연화당초문으로 단청을 하였다.

 

만력 계유 기원후 222(정조191795)11월 정축 이충무공전서를 펴내면서 1(16)을 통영충렬사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12월 임인에 통제사 이득제에게 명하여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아홉 번 꺾어 구리에 세긴 도독인과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을 차례로 진열하고 뚝기, 나팔, 북 등속을 사당 안팎에 진열하되 각각 장소를 알맞게 하고 말술과 희생돼지를 위패 앞에 차린 다음 갑옷을 입은 채로 유명수군도독조선국 증효충장의 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이순신에게 받들어 올리면서 이르되 경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전서를 보아라. 혁혁하게 빛나는 14편 나머지가 모두 전쟁의 자취라. 천지가 변하는 행세하며 바닷가 거북선 뱃전에서 기러기 소리를 듣는 심정이라든지 진도독 등장군에 관한 일이며 호남과 영남에 이어진 진영의 형상등이 역력히 나타나있다. 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하면 어룡이며 초목까지도 경의 이름을 안다든지, 처자를 버리고 칼을 잡게 된 일들의 경중을 가려서 글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책은 널리 자료를 모아서 처음으로 이룩된 것이기에 충렬사에 간수하게 하고 이에 통제사에 명하여 삼가 잔를 올리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바이다.“  전하여 이르시되 어제 섬돌 아래에서(외직으로 떠난다는) 하직 인사를 하는 영재가 있기에 그에게 새로 간행한 충무공전서를 가지고 가서 통영충렬사에 소장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나서 밤에 또 촛불을 밝히고 (충무공전서를) 자세히 보니 그 분의 충효를 새삼 느끼겠고 원대한 생각은 백재에서 일으켰는데 찬탄과 탄식을 거듭하며 앉아서 생각을 깊게 고쳐해 봐도 (5자 불멸) 책이 만들어진 뒤 제사를 지내도록 일찍이 하교한 적이 있어 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묘에서도 제사를 올렸거니와 이제는 그의 사원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원 중에도 통영의 충렬사가 충무공의 공적이 가장 드러난 곳이므로 통제사에게 명하노니 날을 잡이 제사를 모시도록 하되 제문을 지어서 보낼 것이니 고을 수령을 집사관으로 하고 나머지는 부근 수령들에게 사무를 담당시켜 뜰에 벌려서는 것과 제물은 모두 제문 중에 열거한 것에 의거하여 행하라. 제사를 예대로 마친 뒤 집사관과 영에 소속된 장졸들을 나누어 사격시험을 치르되 2발 맞힌 자와 그 이하로 등급을 매겨 즉시 시상한 후 문서로 보고하고 나머지는 별단으로 보고하라. 통제사에게 또 이르노니 충무공전서 1질을 의민공 이억기의 집에 주나니 그의 손자 완천군 이명규를 불러 친히 가져가게 하라. (2자 불명) 여기에서 영암의 고 정운의 충렬이 생각나는데 충무공과의 관계를 보면 스스로 맹세한 검 명에서 그의 뛰어남과 위대한 공적 그리고 크나큰 절개가 얼마나 늠름하였던가를 알겠도다. 평소 생각하기를 의민공은 열을 표한 것 뿐 이고 정운의 충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노라. 이는 특별한 습속으로 세력 있는 문벌만 아는 것이니 이에 관련된 자 어찌 개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의 집에도 1질을 나누어주고 그의 사손을 방문하여 장문할 일은 호남도백이 상경하여 아뢰도록 하라. 금상즉위 20(정조191795) 을묘 12월 일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신 이득제 삼가쓰다


~통영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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