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頭龍浦記事碑

청풍헌 2015. 9. 28. 18:26



頭龍浦記事碑

세병관(洗兵館)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는 이경준 제6대 통제사(統制使)가 우리 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한 치적(治績)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1625) 구인후 제19대 통제사가 세웠으며,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과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문 밖의 바닷가 큰길가에 세워져 있었으나 광무 8(1904) 이학재(李鶴在) 이승주(李承周) 두 사람이 세병관(洗兵館) 앞뜰에 옮겨 세웠다. 19964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는 운문(雲紋) 위에서 용 2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두룡포기사비 해설 

(창원부사 박홍미가 1625년에 지은 것으로 1846년 박홍미의 관포선생문집 편에 전문있음.)

두룡포에 진영이 설치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선조 때)에 옛 통제사 이경준(6, 9대 통제사) 공이 세운 것이다. 공께서는 이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셨고, 또한 군사 요충지(要衝地)에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토록 이롭게 하셨다. 사람들은 그러한 이로움을 편히 여기고 그의 은덕을 생각하여 모두 돌로써 그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그것의 전함이 오래되었으면 하여서 지금 통제사 구공(19, 25대 통제사 구인후(具仁   ))에게 호소하였다. (구공은) 일찍이 공(이경준) 막하의 보좌관(輔佐官)이었는데, 매우 깊이 인정을 받았었고, 또한 그의 은택을 생각하고 즐거이 들어 그 훌륭함을 완성하고자 하셨다. (구공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명령하심이 엄숙하여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감히 사양할 수 없어 그것의 대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이경준)은 재상을 지냈던 모(: 비문 등에는 이름자가 '()'으로 되어 있다)의 아들로 한산 목은 공의 후손이다. 씨족의 흥성과 세덕(世德)의 무성함은 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 비석에서는 이것들은 생략함직 하다.공의 형제 네 분은 구슬을 꿴 듯이 함께 드러나셨다. 한 분은 지금의 지사인 경함이니 쌓인 덕망이 오늘날의 일인자요. 한 분은 좌랑을 지냈던 경류인데 임진란에 죽었으니, 나라 일에는 온축된 재주를 펴 보지도 못했다. 한 분은 지금 소윤 경황으로 비록 과거를 밟아서 진출한 것은 아니나, 직무를 변함없이 경건히 수행하여 외, 내관을 여러 번 옮겨 다님에 능숙하다는 명성이 있다. 공께서는 비록 무예출신이지만 서, (, )에 널리 통하고 시, (, )를 돈독히 즐겼으며 온화하여 옛 선비 장수의 풍모가 있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곧 명성이 있었다. 관서(關西: 평안도)에서 두 번 관찰사를 지냈고, 해서(海西: 황해도)에서 두 번 관찰사를 지냈으며, 호우(湖右: 충청도)에서 한번 장수를 지내셨다. 군사와 백성들이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신명처럼 두려워하여 관할하는 곳이 안정되어 무사하였다. 대개 그의 어짐과 위엄 및 방책(方策)에는 다른 이 보다 크게 뛰어남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조정에서 중히 여겨 요해지(要害地)를 맡겨 두 번 통제사가 되었다. 통제사 직책은 삼도(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모두 거느리고 영해(領海)를 장악하였으니, 지위는 높고 임무는 막중하였다. 변방수비를 맡김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으므로 당세의 으뜸이 아니면 이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설치된 것 또한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지난 임진(壬辰)에 이순신 공이 바닷가 일부분의 군대로서 대적을 무찔러 수륙병진을 못하게끔 하여 중흥 제 일의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으로 줄만한 관직이 없었고 또한 중요한 권한을 주지 않는다면, 여러 장수들을 삼가 시키고 눌러서 동남(東南)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통제영을 설치하여 그에게 벼슬을 주었다. 진영은 애초에 한산에 있었는데, 오른쪽에 치우쳐서 왼쪽과는 멀었다. 사이에 고성으로 옮기니 전선을 숨기는 데는 편했으나 급한 일에 대응하기에는 불편했다. 장수되어 오는 자들이 고식(姑息: 좀 더 있다가 좀 더 있다가 하는 모습)에 익어서 다시 설치하지 못하더니, 공께서 장수가 됨에 이르러 개연히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지형을 보고 헤아려서 두룡으로 진을 옮기니, 서쪽으로는 악포에 의거하고 동으로는 견내량을 당기고 남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으로는 평평한 뭍으로 연결되었다. 깊숙하되 구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으니, 수륙의 형세가 참으로 국방(國防)의 요새(要塞)로다. 동에서 남으로 하여 서쪽으로 가던 도적들이 이곳을 지나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게 되어서, 바다물결이 놀라던 일이 없어진 것(해적들이 쳐들어온다거나 해상전투가 없음을 말한다)이 거의 수십 년이 되었다옛날 조적이 초성으로 진영을 옮긴 이후로 조나라가 함부로 가까이 오지 못했고, 유익이 면()과 하구(夏口)로 옮겨 다스리니 북로가 함부로 엿보지 않았다. 지리(地利)의 험난함이 비록 천연으로 만들어진 곳이더라도 반드시 (적격의) 사람을 만나야만 요새지(要塞地)가 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두룡포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소금 끼 많은 하나의 포구로 여우와 토끼들이 뛰노는 언덕으로 끝났을 것이다. 몇 천 만 년을 거쳐 오는 사이 몇 천 몇 백의 사람들이 거쳐 갔건만 공의 손에서 비로소 이룰 수 있었다. 하늘이 이 험난한 곳을 설치하고 때를 기다렸고 또 사람을 기다린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충무공께서 앞에서 적을 이겨 중흥의 공적을 거두고, 공이 뒤에서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의 이로움으로 만들었으니, 전후 두 이공(李公)이 때를 맞추어 출현했다고 비록 말할 수 있으나, 유독 공의 자취만 민멸(泯滅)되어 전해짐이 없으니 어쩌면 현명한 자손이 그 집안을 일으킴이 없어서일까? ! 두룡의 험난함은 공을 얻어 국방의 요새지가 되었고, 공의 공적과 덕은 또한 구공을 얻어 비석이 세워지게 되었으니, 땅만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요, 사람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구공은 본디 중신의 친척으로 이 진영을 맏게되니 그 공명과 사적은 공이 현재 통제사로 있고 또 이러한 일들을 주관 하였으므로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이 논하기를 기다리노라.


통훈대부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 찬

어모장군행룬***** *** *


                                                      국역 문우회·감수 이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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