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토요걷기

제57회 토요걷기(통제사길2) 한퇴골 몰자비 진실에 접근하다.

청풍헌 2015. 10. 14. 21:36

문화원 통제사길 걷기가 10()에 잡혔다.

의논하여 토요걷기도 같이 동참하기로 했다.

통영에서 활동 하는 통영길문화연대가 통영 걷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료는 문화원에서 발간한 통제사길 자료집이다.

금요일 아침에 블로거를 검색 하다 닥밭골 심충성님의 블로거에서

한퇴골 몰자비의 포스팅을 보았다.

뭐지? 일전에 서로 안부를 주고받을 때 통영의 문화재도 포스팅 해달라고 부탁 했었다.

자세히 살피니 세상에나 사라진 글자를 복원했다.

사진을 살피니 매직으로 글자를 썼다.

통제사구공명겸 ㅁㅁㅁㅁㅁ불망 계묘 삼월 일

또 좌측 아래에도 작은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수차례 보았지만 보지 못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오전에 통화를 했다.

어떻게 찾았는지 자세히 물었다.

 

카풀 관련 협의 하고 문화원으로 출발했다.

다시 노산 출발점으로 이동하고 도착점인 원동에 차 3대를 두고 노산에 모였다.

10월 각종 행사가 겹쳐 참여 인원을 걱정 했으나 24명이 함께 했다.

원장님의 주옥같은 해설을 들으며 황금빛 물결 출렁이는 한퇴들을 걸었다.

나락 냄새가 진동을 한다. 배부른 냄새다.

춘원에서 구허로 역을 옮겼으며 난중일기 15954월 초10일에

"구화역의 역졸이 와서 보고 하기를 적선 1척이 또 역 앞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동수(洞樹)를 따라 이동하면 공권수 공덕비가 있다.

풀을 베지 않아 풀숲에 가렸다. 낫을 가져오지 않아 베지 못했다.

옮겨진 조경 통제사 앞에서 문화재의 중요성을 강조 하셨다.

수의사도조공석여휼민비 앞에 왔다.

통제영 군민들을 구휼한 암행어사를 칭송하는 비가 남의 산소 아래에 위치했지만

머릿돌을 세워 비 가림을 했는데 세월이 지나며 앞으로 약간씩 밀려나와

비석이 파손되지 않을까 걱정 된다고 했다.

최선의 방법은 옆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안내판을 새웠으면 한다는 제안에 흔쾌히 허락하신

시청 문화관광과 담당자에게 큰 박수가 쏟아졌다.

한퇴골 석산 초입의 마을 정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은 땀 한자로 원래는 대치(大峙) 즉 큰 고개였다.

땀을 흘리며 넘는 고개의 뜻인데 이는 의미가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퇴정(汗堆亭)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저수지를 지나 한퇴골 농원 화장실을 이용 하고 백우정사 갈림길의 몰자비에 왔다.

 

세상에나! 몰자비를 보니 위치가 옮겨져 있다.

백우정사 불사를 하면서 입구의 길이 좁으니 5~6m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글씨가 쓰여 있다. 통제사구공명겸ㅁㅁㅁㅁ불망 계묘삼월일.

구미 향토 사학자 심충성씨와 통화한 내용인 즉 몰자비를 자세히 살펴보니

옆의 구현겸비와 비슷했다.

글자의 세로 줄 수와 형태가 비슷하여 일단 구현겸비라는 가정 아래 획수를 추정했다.

먼저 글자의 흔적에 물을 뿌리고 이끼가 불어나면 칫솔로 문질러 이끼를 깨끗이 제거한다.

다음 희미한 표시의 획수를 따라 추정했다.

통제사구공(統制使具公) 까지는 추적 되었는데 현()자는 아닌 것 같아

한자 획수 중 삣침이 있어 현()자는 아니고 구신비 전설과 유사한

구씨 성을 가진 통제사는 역모에 전시 효수된 구명겸(具明謙) 통제사가 검색 되었다.

가운데 이름이 밝을 명() 자였다.

() 자는 말씀언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중간 줄 글씨의 마지막 부분은 불망(不忘)이며 마지막 줄은 계묘(癸卯)삼월일(三月日) 이다.

 

여기서 불망비가 훼손된 사유를 알아보자.

구명겸 통제사는 17814월부터 17831월까지 재임한 통제사이며 

3년 후 5촌 당숙인 구선복의 역모에 연루되어 전시효수 당했다.

그러니 스토리와 구명겸 통제사가 일치했다.

당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세력들 틈에서 위험한 정치를 하고 있었다.

홍국영을 제거한 후 당시 병권을 쥐고 있던 구선복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뒤주를 갖다 준 인물로 정조가 제거대상으로 삼았다.

시시각각 죄어오는 숙청의 공포 속에 스스로 살길을 찾아 도모 한 것이 발각되어

고신(고문)을 당하여 자백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구선복의 양아들 구이겸이 고신으로 구명겸의 연루를 자백하자 효수 당했다.

이는 정조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va_11012009_002

정조 22, 10(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 129(무신) 2번째기사

구명겸을 남문의 밖에 삼군을 모아 놓고 효수할 것을 명하다.

전설과 몰자비의 남은 획수의 흔적, 통제사 재임일자, 실록의 기록과 일치된다.

전문가의 추론에 의하여 거의 정확히 복원 되었다.

세상에는 한 분야에 고수가 있는 법.

우연찮게 알게 된 블로거가 인연이 되어 오래된 숙제가 풀렸다.

원장님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접근이라 했다.

후대에 역모에 연루된 통제사 암각비를 쪼아서 글자를 지운 것이다.

좌측의 통제사구공현겸 비에도 청소되어 글자가 뚜렷했다.

탁본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마모될 것이다.

 

한퇴 고개 마루에서 점심을 먹었다.

각각의 도시락을 한곳으로 모으니 여러 가지의 반찬과 김밥이 모였다.

본시 이 고개는 매우 가팔라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는 고개다.

도산면장이 길을 뚫었는데 점심을 먹은데 다 여성들이 많아 임도를 따라 가면서

넓은 원산들과 사량 앞바다를 보면서 가자고 하여 임도로 나섰다.

길가에는 구절초가 청초하게 피었고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하나도 없다.

어느새 밤송이는 다 떨어지고 도토리만 나뒹굴고 있다.

멀리 사량 앞바다는 아스라이 윤슬이 빛나고 원동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렁인다.

 

원동 숲으로 내려섰다. 잠깐 땀을 식히고 연안김씨 선산으로 향했다.

통제사길을 걸으며 왜 이곳에 오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본디 연안김씨 시조 김섬한의 묘는 세병관 터에 있었다.

이경준 통제사가 두룡포에 통제영을 열고 세병관을 세울 터를 보니

그곳에 묘소가 있어 이장을 하라 했는데

금은보화만 챙기고 방치하여 꿈에 나타나 괴롭혔다.

통제사가 확인하니 이 지경이라 다시 북산에 묻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1626년 김여엽. 여욱 형제가 남긴 "남행기문에 기록되어있다.

세병관 설화와 관련이 있는 연안김씨 시제는 경기도 양평으로 모시고 가서

선산이 벌초도 않고 방치된 느낌이다.

북한 김일성이 연안김씨라고 한다.

김일성과도 관련이 있을라나?

 

통제사길은 통영에만 있는 가장 통영스런 길이다.

옛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자취를 찾아보았으며 변화 하는 자연을 느끼며

좋은 사람들과의 하루 나들이는 마음을 살찌우는 양식이 되었다.

오동통 살이 오른 노루 궁댕이가 생각나는 가을이다.

 



 

2015.10.10. 통제사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