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통영은 문화 예술의 도시다

청풍헌 2015. 11. 3. 22:44

통영 이야~

통영은 문화 예술의 도시다. 300년 통제영의 뿌리가 내려 근대 100년을 거치며 좋은 토양에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골목골목 사연이 깃든 곳, 언니와 도란도란 걷던 길, 이야~길을 따라 문화예술을 만나러 가보자. 강구 안은 원래 이름은 병선마당이다. 또는 통제영 선소라고도 했다. 그러나 매립으로 이름이 변하여 문화마당으로 칭한다. 이름은 한번 정하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작명은 신중해야 하고 정확해야 한다. 자손만대에 물려줄 만큼 좋은 이름을 찾아서 불러 주어야 한다. 통영의 정체성은 통제영이다. 통제영은 수군이다. 수군의 주력은 함선이다. 즉 판옥선이 주력이다. 이 판옥선을 계류하고 정비 하던 곳 병선마당이 이름을 잃었다. 병선마당에는 3척의 거북선과 1척의 판옥선이 있다


먼저 남망산 공원으로 오른다. 공원 입구 우측에 있는 주택은 은백색의 화가 김형근 화백의 집이다. 김화백은 미국에서 활동을 하시며 뉴저지 시는 매년 4월을 김형근 화가의 달로 정해져 있다. 이곳에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지목 변경과 기타 행정조치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책임을 지고 하는 사람이 없는지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남양주에서 미술관을 유치하려 하고 있다. 남망산을 오르면 우측 입구에 화강암으로 세워진 정의비가 있다. 이 정의 비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기림 비다. 등록된 위안부중 경남에서 가장 많이 잡혀 갔으며 특히 통영 거제에서는 이곳 병선마당에서 부산으로 시모노세키로 이동했다. 그래서 시민단체인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거제통영 모임에서 주도하여 지방자치단체 중 전국 최초로 시민모금 운동을 하여 기림 비를 세웠다. 강구안이 훤히 내려 보이는 이곳에 일본을 향해 정의를 외치는 형상으로 만들어 세웠다. 위안부, 성노예, 아직도 진상이 풀리지 않는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인정을 하지 않는 이상한 전쟁의 상처다. 통영에는 97살의 김복득 할머니가 생존해 계신다. 통영의 어린 학생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으며 당시의 실상을 낫낫이 증언하고 있다. 그 실태를 책으로 엮어 출판 하여 중 고교에 배포 했으며 일어로 번역하여 아베총리에게 보내고 유엔에도 보냈다. 이후 장승포의 거제문화회관에도 세워졌다. 남망산 공원은 많은 예술인들이 오르내리며 예술의 혼을 기리던 곳이다. 좌측 언덕에는 국제조각전을 하여 세계적인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허공이라는 직품인데 남자의 나신을 조각해 놓았다. 이 청동 조각상은 당초 회관 입구에 세웠으나 시민들의 민원에 의하여 아래로, 또 다시 더 아래 구석으로 밀려났다. 원초적 본능을 표현한 작품인데 남자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특히 여성들이 혐오스럽다 한다. 작은 숲속 길을 통과하면 초정 김상옥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초정 선생은 독학으로 공부한 시, , , 전각에 두각을 드러낸 분이다. 대표 시조 봉선화는 만주에 살고 계신 둘째 누님을 보러 문전걸식 하며 찾아가 누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알려졌다. 둘째 누님은 초정을 특별히 애틋하게 여겨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찾아와 용기를 주고 했었다. 초정선생의 성품은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5일 만에 세상을 떠난 지독한 애처가요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초정선생의 시비 아래에는 열무정이 있다. 국궁 장으로 수차례 이전을 거듭 하다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활은 조선시대 개인 무기다. 일본의 조총보다 더 과학적이고 무서운 활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수시로 활을 쏘았다고 기록되어있다. 활은 개인 무기인 동시에 수양의 도구로 삼았다. 집중력과 도를 닦는 심정으로 수행을 해야 명중을 시킬 수 있다. 개인 수양인 동시에 전시에는 특등 사수로 자기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통제영 시절 무과 시험장이 있었던 곳이 열무대다. 즉 장대 골에 사정(射亭)을 만들어 임금의 양해 아래 무과시험을 보았다. 통제영이 혁파되고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많은 유적이 훼철되고 사라졌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통영지에는 수많은 사정(射亭)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 곳에나 표적지만 세워 놓으면 사정(射亭)이 된다. 조선시대의 표적지는 염소 가죽이나 사슴가죽에 호랑이 무늬를 그린 뒤 두루마리 형태로 갖고 다녔다고 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수많은 습사에 의하여 명궁이 되어 자신을 다스리고 부하들과 교류의 장이된다. 조각공원이 끝나는 곳에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와 두꺼운 철판이 놓여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관계항 이라는 이우환의 작품인데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표현한 다분히 철학적인 작품이다. 구입당시 2천만 원을 주었는데 돌 한 덩이와 철판 한 장에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지불하나 하고 원망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행복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나는 오늘도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려다 뵈는 우체국 창문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잠긴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도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류치환 이 우환 작가는 현재 일본에서 거주하며 현존하는 작가 중 옥션 경매가가 가장 많은 작가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메인전시실에 전시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가다. 우리 통영 남망산 공원에 이우환의 작품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과거 남망산 주위로는 가난한 달동네가 형성 되어 있었다. 공원 정비 사업으로 깨끗하게 정비하고 새 단장을 했다. 공터에는 주차장을 만들고 옛 조선소 터는 매립하여 해경부두로 변했다. 남망산의 남쪽 계단으로 오르면 수향정 이라는 정자가 있다. 당시 시멘트로 지어져 지금은 볼품이 없다. 수향정 앞에는 이충무공 한산대첩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원래 있었던 비는 착량묘로 옮기고 새로운 비를 세웠다. 옛 비석의 글자를 한자 한자 필사를 한 적이 있다. 기존에 있던 비는 노산 이은상이 짓고 이순필이 쓴 아주 고졸한 서체를 자랑하던 비인데 왜 바꾸었는지 알 수 없다. 비문의 글자는 사진이나 읽는 것 보다 직접 쓰 보면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 눈으로 귀로 머리로 느끼는 것 보다 가슴으로 와 닿는 것이 훨씬 절실하다. 남망산 정상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1952년 임진년 60주갑에 군민의 성금을 모아 1953년에 세웠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풍전등화 같은 시국에 나라를 위한 마음에 임진왜란의 한산대첩을 생각하며 나라를 지킨 이순신 같은 장수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동상을 세웠다. 김일룡 문화원장님께서는 옛 군청자리 앞의 농협창고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2기를 만드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본인은 우연히 보았는데 그때가 6세였다(1947년생) 당신께서는 그때 그것을 본 것은 이 일을 하라는 계시였을 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당시의 잣대로 장군의 복식이라든지 칼이라든지 제대로의 고증도 없이 제작하다 보니 중국의 갑옷에 장검을 들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군을 학익진으로 섬멸한 전투현장을 굽어보고 계신다. 장군의 동상에 참배하고 뒤쪽으로 내려오면 한산도가의 비석이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초정 김상옥 선생의 20대 때의 글씨다. 등나무 터널을 지나 좌측으로 내려오면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 선생의 화비가 있다. 김용주 선생은 이중섭을 돌봐 준 화가로 투계, 방위, 자화상등 소수의 작품이 있는데 2011년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성대하게 했다. 부인이 마산에 거주하며 따님은 김설 숙명여대 교수로 옻칠 공예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동랑 유치진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친일이라는 이유로 동상이 철거되고 비어있던 곳이다. 김용주 화백은 산양면에 농장이 있어 이중섭을 위하여 소달구지에 쌀이나 부식을 싣고 머슴이 갖다 주었다고 한다. 사냥이나 투계를 즐겼으며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예술인들은 대부분 그런 기질이 있었다. 이중섭도 복자네 집과 새미집 근처에서 청마와 대작을 하고 술집 다다미에 그림을 그리다 주인에게 혼나기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마의 깃발 시비가 있다. 너무나 유명한 깃발은 노스탈쟈의 손수건으로 비교되는 아름다운 시다. 시민문화회관 좌측 분수대 쪽에는 김 약국의 딸들영화촬영장소라는 표석이 있다. 용란이 와 한돌이 뒹굴었던 장소(남망산 사장터)에 세워 놓았다


남망산을 내려오면 김춘수의 꽃 시비가 있다. 꽃 시비는 항남동 현 초정거리에 세워졌는데 어떠한 연유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하나의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 처럼 /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과 향기라는 시민단체가 시비를 세우기로 하여 꽃 한 송이 만원씩 기부를 받아 시비를 세웠다. 이후 청마를 지키는 사람들과 합병하여 통영예술의향기가 발족했다. 시비 우측 길 건너가 통영 3.1운동 삼열사중 한 분인 허장완 열사의 생가 터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천동 윤이상 음악당 옆이라 하여 표석을 세웠다. 확인해 볼 일이다. 허장완 열사는 후손이 없어 양자를 입적 했는데 손자가 허만기옹이다. 현 통영 3.1독립운동회를 이끌고 있는데 여러 이야기가 있다. 항목(項目)을 건너면 김춘수 생가가 있다. 생가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데 매입단가가 높아 매입을 하지 못하고 해핑이의 옛 한려해상국립공원 사무소 건물에 유품전시관이 있다. 대여 김춘수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랐다.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보모로 있었던 호주 선교사집을 드나들며 공부를 했다. 청마의 결혼식 때 화동으로 꽃바구니를 들었으며 커서는 통영의 문화 예술을 위하여 청마, 초정, 윤이상, 전혁림등과 함께 통영 르네상스를 꿈꾸며 활동했다. 동피랑은 동쪽의 가파른 벼랑 언덕이란 뜻으로 달동네를 말한다. 달동네는 달이 뜨는 언덕을 말하는데 못살고 없는 사람들이 학구 방을 지어 방 하나 부엌 하나에 공동 화장실을 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통영시는 동피랑 달동네를 철거하고 공원화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이주 보상비로는 다른 곳에 가서 방 한 칸도 구할 수 없는 작은 금액 이었다. 시와 시민단체, 마을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벽화를 그려 보자는 제안으로 벽을 정비하고 벽화를 그려 단장했다. 최초 주도는 통영RCE가 했었는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푸른 통영 21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고 한다.(2015년 푸른 통영21은 해체됨) 당시 벽화는 신선한 충격 이었다. 볼품없는 달동네 좁은 골목길에 알록달록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통영만의 특별한 사투리를 입간판에 세워 놓았다. 입에서 입으로 SNS를 타고 인지도가 높아만 갔다. 주최자인 푸른 통영 21은 연대도와 연계하여 계속적인 관심과 변화를 꽤하였다. 벽화는 치열한 경쟁력을 치른 공모전으로 2년마다 바뀌고 마을이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꾸준히 대화했다. 지금은 통영을 대표하는 젊음의 아이콘이 되었다. 통영 하면 동피랑을 안 가보면 서운하다 할 만큼 유명해졌다. 많이 알려진 만큼 폐해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다보니 상업화가 급속도로 진행 되었다. 아기자기 하던 골목에 가게가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심지어 외지인이 목 좋은 곳을 사서 구조변경 후 찻집을 만들었다. 어디나 사람이 끊는 곳은 장사가 판친다. 이러다 너무 상업화가 진행되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될까 두렵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지난해 대구올레에서 연수차 동피랑을 올랐는데 그때 했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돈다. 도시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 할 때는 시골 골목길의 순수한 풍경과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오는데 너무 상업화로 치닫으면 누가 오겠나? 통영만의 정체성을 찾는 게 중요 하다는 의견 이었다. 통영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동포루? 병선마당? 통영성


동포루의 성벽을 따라 서문으로 내려간다. 서문은 금숙문 이라 했다. 홍예문으로 아치 형태의 돌을 쌓아 만든 아름다운 문이었다. 옛 지도에 표기 되어있다. 서문고개를 내려오면 주전 골이 나온다. 주전 골은 통제영 주화를 만들던 곳이라 주전 골이라 했다. 세병관 통제영지 복원 현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주전소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가 전무하여 발굴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근래 복원 작업 중 가장 잘 한 일이다. 모르면 그냥 두어야 한다. 후세가 연구하고 명확히 고증되면 그때 복원하면 된다. 섣부른 곰이 재주를 넘다가 다칠 경우가 있다. 주전골 새미를 지나면 김용식 김용익 기념관이 있다. 김용식을 초대 외무부 장관으로 알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용익을 잘 모른다. 김용익은 누구인가? 김용익은 우리나라의 전통생활과 습속을 영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소설가다. 통상 한글로 쓰인 소설을 세계에 알리려면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데 김용익은 영어로 소설을 쓰 미국과 유럽의 교과서에 실려 많은 세계 청소년들이 공부했다.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꽃신, 뒤웅박, 해녀, 씨 값, 푸른 씨앗 등 토속적인 언어로 세련되게 풀어낸 언어의 마술사 같은 분이다. 당시 잊혀지고 묻히는 것을 통영예술의 향기라는 순수 민간 시민단체에서 발굴 선양작업을 주도하여 부각 시켰다. 작품의 내용은 대부분 고향 통영에서 일어나는 전통적인 생활과 당시의 습속을 아름답게 풀어낸 서정적인 소설이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맞먹는 소설 꽃신은 신집 딸을 사랑한 백정 아들 상도의 애틋한 사랑이 표현된 소설이다. 소설 소나기와 꽃신에 흐르는 기조의 느낌은 비슷하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1953<신문학> 5월호에 발표 되었고 김용익의 꽃신은 1956년 단편 '꽃신'(The Wedding shoes)을 미국에서 발표했다. 다시 돌아서 내려오면 류치환 생가 터가 있다. 생가 터는 도로에 편입되어 정량동 망일봉 아래 기상대 근처에 복원했다. 청마는 고향 통영을 노래한 여러 편의 시가 있다. 그의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에서 왕고모 댁 제삿날 밤 열나흘 새벽 달빛을 밝고 /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 번문욕례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하고 난 곳은 노도처럼 밀려 왔던 왜의 세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한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있는 바닷가 통영이었습니다. 라고 했다. 한 때 거제와 출생 장소를 두고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기억 속에 저장된 고향에 대한 감정은 분명 통영일 것이다. 태어난 곳보다 자란 곳이 인격을 형성 하는데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청마와 중앙동 우체국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시인 이영도 여사에게 수천통의 연서를 썼다. 행복이라는 시를 지어 행복해 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 몇 차례 이사를 했다. 최종 거주지는 중앙시장 안에 있다. 새마을 금고옆 공터가 과거 통제영이 폐영 될 당시 관기를 관장 하던 기생청의 권번들이 조합을 형성하여 있던 곳이라 하는데 이곳은 3.1독립 운동 후대의 조합 터라고 한다. 당시기생들은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여 3.1독립운동 당시 금비녀와 가락지를 팔아 만세운동을 주도 하다가 투옥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는 재판기록에 나온다. 재판정에서 판사에게 일부종사 하는 것이 조선의 기녀된 도리인데 어찌 일본을 섬길 수 있느냐 하며 호통을 쳐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절개를 보인 통영출신의 기생들이다. 충무 데파트 자리는 과거 통영경찰서 자리다. 일제 강점기 통영의 거부 김덕보 여사가 부지를 희사하여 통영경찰서를 세웠는데 그 은공을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 경찰서가 죽림으로 이사 가면서 시민단체의 의의제기로 비석은 파쇄 되었고 기념식도 없어졌다 한다. 김덕보 여사의 흔적이 통영 곳곳에 있다. 북문 안 새미를 중수 했으며 통영중학교 부지를 희사하여 학교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공덕비가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거제를 병합하여 통영군이라 했다.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노덕술이 근무 했으며 해방 때는 감금 사건도 있었다. 임정복은 단신으로 경찰서에 들어갔다가 경찰의 착검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향경대와 경찰의 협상으로 통영 최초 시민 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이후 일본 경찰은 감옥으로 일본인들은 본원사 절에 감금 되었다. 왜 이것만 있겠나? 일본 순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악랄한 착취 수단 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깊은 골이 남아 있어 순사, 순경을 짜바리, 짭새 등으로 불린다


이영도 여사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부친 중앙 우체국을 지나면 통영성의 정문인 남문 터가 나온다. 지금도 그 당시의 사진이 있으며 사진에 있는 기와집도 존재한다. 남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넓은 공터의 주차장이 있다. 초기 일인들이 투자하여 봉래좌를 세웠다. 여러 변천을 거쳐 통영의 문화를 꽃 피웠던 곳인데 극장의 대형화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어느 날 헐어서 주차장을 만들었다. 통영 문화의 한 축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도의원 김기정 규탄대회가 열렸으며 윤이상이 작곡한 노래가 연주되기도 했다. 두고두고 후회하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충무교회는 현재 통영성 안의 가장 높은 건물이며 세병관을 가리지는 않지만 서피랑에서 내려 보면 통영항의 조망을 가린다. 나포리 모텔과 함께 아름다운 통영항의 뷰를 가리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비보장승 벅수가 있던 곳은 과거 큰 대로였다. 통제영지는 종2품 무관인 통제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객사인 세병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아가 있었다. 지금은 일부 복원하여 관광객들을 받고 있다. 사적지 내에는 국보 305호인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내아, 후원 및 12공방을 복원했으며 특히 주전소를 국내 최초로 발굴 했다. 화폐를 발행할 만큼 중요한 유적이다. 주전소 유적은 발굴한 그대로 원형보존 해 놓았다. 후세가 좀 더 연구하여 복원 하도록 두었다. 참말로 잘한 일이다. 어설픈 복원은 안 한 만 못하다. 차라리 후대에 있는 그대로 물려주는 게 타당한 도리다. 통제영지를 나와 관창 골로 오르면 통영청년단 회관이 있다. 이 건물은 3.1독립운동 후 계몽활동을 할 장소가 필요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준공하여 각종 교육과 계몽운동, 여러 사업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서문고개는 김 약국의 딸들에서 용란과 용옥이 울며 넘던 고개다. 김 약국의 딸들은 명정 골과 서문고개가 주 무대다.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엮은 이야기는 통영의 지명과 함께 살아 숨 쉰다.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소설 김 약국의 딸들에서는 통영의 지명 관습, 습속들이 살아있다. 지도의 대구 어장을 비롯하여 굿산먼당, 서문고개 등등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장편 소설이다. 서포루를 복원 하면서 성벽을 복원 했는데 서문 터에는 길이 없다. 복원을 어떻게 했기에 본래의 길을 없애고 성벽을 복원 했다. 12공방의 수많은 장인들이 사라지고 잊혀 겨우 몇 개만 남았다. 주석방, 갓장인, 소반장, 염장(대발), 소목장, 나전장등이다. 서문고개 성벽 위에는 통영의 마지막 갓쟁이 김봉주 옹의 3평집이 헐린 채 흔적만 남았다. 골목 어귀에는 박경리의 육필 원고가 세워져 있고 생가도 있다. 워낙 어렵던 시절이라 번듯한 집 한 채 없이 떠돌던 때 이므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생전에 박경리 선생이 말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조심스럽다. 서포루는 복원 되었고 서피랑은 개발 중이다


하동 집과 공덕귀 여사집, 박경리 살던 곳 등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명정 골은 충렬사가 있는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사당으로 1606년 이 운룡 통제사 때 왕명으로 세워졌으며 통제사가 매년 춘추로 향사를 지내던 곳이다. 통제사가 출영할 때는 명조 팔사품을 앞세우고 기치를 휘날리며 서문고개를 넘어 충렬사에 이르러 제향을 했다. 통제영의 정신적인 중심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을 만큼 유서 깊은 사당이다. 민족주의자를 많이 배출한 오산 고보 출신의 시인 백석은 낡은 사당의 계단에 앉아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시를 남겼다. 현대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백석은 누구인가? 모던 보이 백석은 오산 고보를 나와 일본에서 수학후 조선일보사에 근무할 때 동료인 신현중의 여동생 결혼식에서 운명적으로 ”(박경련)을 만난다. 첫눈에 반한 백석은 난이를 만나러 통영을 방문한다. 이후 서너 번 통영을 기행하며 주옥같은 통영시를 남겼다. 우여곡절 끝에 난이를 신현중에게 빼앗기고 실망하다 자야(김영한)를 만나 같이 살다 끝내 헤어지고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평북청주에서 살다 죽었다. 자야(김영한)는 백석을 못 잊어 대원각(요정)터를 법정스님께 부탁하여 길상사를 세웠다. 충렬사 사당 앞에는 정당새미가 있다. 일정, 월정이라 하는데 윗새미인 일정은 향사에 쓰고 월정은 일반인들이 사용했다. 우물을 합치니 물이 말랐으며 상여가 지나가니 물이 흐려져 상여를 못 지나게 했으며 지금도 두 개의 우물이 옛 풍경을 말해주 듯 존재 하고 있다. 오구작작 지분냄새 풍기던 처니들이 물 긷던 명정 샘이다. 새터 낭까이, 가죽고랑, 도둑고랑, 전기불터, 관란재 등등 수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 명정 골이다. 서호천 복원공사를 위하여 예산까지 확보 했으나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다가 결국 예산을 반납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통영시장(2013) 선거에 쟁점이 되었으나 여당의 여론몰이에 파묻히고 말았다. 아적제자가 열리던 아래쪽 서드레를 매립하여 샛터 시장이 되었고 옛날처럼 아침 시장이 되었다. 동드레와 서드레를 잇는 가죽고랑위에 해방다리가 놓이고 미륵도 사람들의 중요 통로가 되었다. 장공장과 관란재, 탁구장을 지나면 통영군청 건물인 박물관이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 때 미술관으로 예정 했으나 시장이 바뀜으로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잘 운용 되었으면 한다. 통제영의 뿌리 통영학이 열리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2015.11.3

'통영 > 향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찾았다! 산양면사무소  (0) 2015.12.04
향토사 고금도, 대흥사 답사기  (0) 2015.11.23
충렬사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  (0) 2015.10.15
강한루(江漢樓)  (0) 2015.10.12
선무공신 김산걸(金山傑)  (0) 201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