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청풍헌 2016. 1. 12. 22:10

어제 확인한 목욕탕에 갔다. 온탕, 열탕을 전전하며 몸을 풀었다. 역시 피로는 따뜻한 목욕이 최고다. 저녁에 검색으로 확인한 응취루에 올랐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곳에 웅장하게 서있다. 응취루는 곤양객사의 문이라 하는데 곤양유치원과 초등학교 사이에 있었으나 그곳에 복원을 하지 못하고 국궁장이 있는 산중턱에 복원을 했다.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서릿발이 내린 산길을 내려오며 주위를 둘러봐도 안내판이 없다. 산중에 복원한 것도 모자라 안내판도 안 보인다. 무릇 문화재란 사람의 발자국과 따스한 온기, 손때에 의하여 빛난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재라도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응취루도 그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왕 그곳에 세웠으면 유도를 잘 할 수 있도록 안내판을 잘 세웠으면 한다.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장군의 숨결을 느껴본다. 노량까지는 20km 남았다


9시경 출발했다. 아침 공기가 차다. 큰길과 작은 길이 합쳐졌다 떨어졌다 했다. 즉 공사 중이란 말씀. 구 도로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레미콘 공장 앞에 백의종군로 안내판이 반겼다. 밤재구간 3.5km. 차량 한 대 없는 호젓한 산길이다. 길동무가 있으면 좋으련만 약간 무서움이 들었다. 큰 독수리가 하늘을 날았다. 휘둘러 날다가 다시 온다. 혹시 나를 먹잇감으로? 머리가 쭈뼛했다. 포장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등산객 차림의 사람을 만났다. 춘란 산채 나왔다. 이 산에 변이종이 가끔씩 나온단다. 오늘은 남해를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는데 기대를 한다고 했다. 각자 개인 취향이 다양하다. 무었이 옳고 그른것은 모른다. 동양난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과 취미가 있다. 나름의 개성과 전문성을 가진다. 산길구간을 나오면서 차량은 한 대 만났다


산길을 벗어나 이정표에서 한컷하고 버스 정류소에서 휴식했다. 정류소나 마을의 정자는 훌륭한 쉼터다. 송원저수지 위에 폐기물 공장을 짓는것을 반대한 현수막을 보았다. 철새를 쫏아내는 행위란다. 저수지를 보니 오리와 큰 고니(?)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날아 갈까봐 길에서 줌으로 당겨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큰 고니인지는 모른다. 아묻튼 오리보다는 훨씬 크다. 한가로이 목욕을 즐기고 있다. 지루한 길을 걸었다. 노량까지가 목표다.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다. 중평리 상촌마을로 들어섰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정기룡 장군 유허지가 있다. 정기룡 장군이면 하동지부장님의 닉인데 천천히 읽어보고 참배를 결심했다. 생가 터를 복원했으며 사당도 있다. 여러 대문을 통과하여 사당 옆문으로 들어가 참배했다. 이런 훌륭한 장수가 있어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싸웠으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했다. 야간 아쉬운 것은 사당을 관리하는 집에서 이불 빨래를 유허비 울타리에 널어놔 보기 싫었다.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갔으나 사람이 없다


네 시가 넘어가니 초조해졌다. 남해충렬사까지 가야 하는데 다섯 시면 문을 닫을 것이다. 속도를 내었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발이 아팠다. 다리도 천근이다. 아이에게 전화하여 오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공사 중인 도로를 걸었다. 다행이 차량통행이 없어 걷기는 그만이다. 다만 좀, 상당히 심심하다. 이 길이 남해대교 가는 길인데 차량통행이 많고 인도가 없어 걷기는 위험하고 불편하다. 남해충렬사에 가면 어쩌면 이순신학교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내심 기대된다. 해가 넘어가는 남해대교가 보였다. 그래 여기가 노량이다. 이곳까지 전황을 살피고 판단을 하기 위하여 왔었다. 분명 안내판이 있을 건데 보이지 않았다. 남해대교는 1973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현수교이다. 아이에게 전화하니 공룡휴게소라니 절반 왔단다. 시간은 네 시가 넘어간다. 재빨리 대교를 건넜다


남해충렬사로 향했다. 수차례 지나 다녔지만 부끄럽게도 처음이다. 곧장 외삼문 입구로 가니 위당 정인보 선생의 한글비가 보였다.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비와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니 우암 송시열이 쓴 충렬사묘비가 세워져 있다. 특이하게 이수에 단청채색을 했다. 정당에 참배했다. 방명록에 기록하고 내부를 살펴봤다. 우측에는 노량해전가 있으며 좌측 벽면에 명조팔사품을 그려 놓았다. 명조팔사품은 명 황제가 장군에게 내린 물품이다. 즉 장군을 대하듯 하는 신물이다. 판자벽에 그린 그림이 조악했다. 아쉽다. 통영충렬사에 의뢰하여 신관호 통제사가 그린 팔사품도를 영인하여 세워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 뒤에는 가묘가 있다. 노량해전에서 순국 후 관음포에서 이곳으로 옮겨 임시 안치 했다가 고금도 통제영 월송대로 이동한 후 아산으로 운구했다. 해설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며 다섯 시가 가까워 요청할 수 없었다. 거북선은 공사 중이라 막아 놓았다. 명조팔사품관련 조언을 하려고 사무실로 갔다. 문을 여니 안면이 있는 분이 계신다. 수인사 하니 이배사 남해지부장이신 이억기님이다. 퇴근시간이 임박하여 오래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이순신학교님을 만나보고 가라는 이야기에 기대 되었다. 근무지로 이동하며 전화 드리니 삼천포 나가 계신단다통화만 하고 이락사로 이동했다. 아이가 올 때 까지 해설사 사무실에서 따뜻한 차로 몸을 녹였다. 이락사도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남해에는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2남해대교를 건설 중이며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이순신 전몰지를 성역화 하고 있었다. 고성 당항포 유적지에 버금가는 공사를 한다. 우리 통영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부러울 뿐이다.

 

정유년 7월 21일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가 고을에 있고 백성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힘써서 혹은 이른 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밀보리 밭을 갈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나온 군사들과 백성들도 울부짖으며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서니 이 지경에 이러렀다." 는 것이다. 그들이 대장이 잘못을 말한것을 입으로는 다 말 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사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에서 지내며 수군 재건을 고민하는 장군을 상상해 본다. 연속 이틀 걸음은 힘들었다. 특히 발이 아팠다. 신발이 불편하여 물집이 생겼다. 그래 이정도 쯤이야 감수할 일이다. 장군을 생각하며 걸은 길은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감사하다. 의지대로 할 수 있어 감사하고 주위에서 도와주어 감사하다. 자료를 더욱 세심히 검토하여 일을 벌릴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을.....



20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