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청풍헌 2016. 4. 19. 07:27

83(신유)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 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를 한 뒤 삼가 받은 서장을 써서 올리고 이날 바로 길을 떠나 곧장 두치 가는 길에 들어섰다. 초경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삼경 말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고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길을 잃고 강정으로 잘못 들어갔기에 말에서 내려서 불렀다. 쌍계동에 이르니 어지러운 암석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고 갓 내린 비에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고 지키다가 나를 보고는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저물녘 구례현에 이르니 온 경내가 쓸쓸했다. 성 북문 밖 전날 묵었던 주인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이 바로 와서 만났는데 곡식까지 가지고 왔으며 손응남은 때 이른 감을 바쳤다.

 

수군재건로 답사 날짜가 내일로 다가왔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은 기대되고 설렌다. 내일 비가 예보 되었는데 걱정도 되고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고민된다. 통영지부에서 3명이 같이 간다했는데 여성이다. 숙소는 어떻게 하지? 일요일은? 돌아오는 교통편은? 모든 것이 미지수다. 무었을 보고 느낄 것인가? 자료는 무었을 참조하지? 답사기는 어떤 방향으로 하지?

 

석주관의 코스는 지리산 둘레길 7코스와 겹친다. 국도에는 인도가 없어 걷기가 불편하다. 그렇다고 수군재건로인데 산길을 걸을 수 없다. 수차례의 검토 끝에 옛길이 정답이다. 장군이 걸었던 수군재건로를 답사 하는데 당연히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할 것이다. 마음속으로 결정 하고 나니 한결 수월하다. 이 길은 나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지도와 현지 위치를 참고삼아 걸어야 한다.

 

전남의 수군재건로 답사 합니다.

칠천량 패전의 소식을 접하고 전황을 살피러 노량으로 갔다 손경례가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수임 된 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수군뿐이라는 심정으로 믿을 수 있는 전라도를 순행 했던 수군재건로를 답사 합니다. 장기적인 프로젝트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용기 내어 시작 합니다. 매월 셋째 주 토, (12) 4~9(12)

 

일시: 2016. 4 .16~17(12)

코스: 1일차; 석주관~운조루~섬진강길~용호정~서시교~손인필 비각~명협정, 구례현청(1)

2일차; 구례현청~구례구역~압록~곡성섬진강 천문대~야영장~가정마을

기타: 워킹화, , 세면도구

 

첫 출발은 충렬사 08:00 집결 배례 후 출발 합니다. (충렬사 협조 완)

 

6명이 충렬사에 모였다. 정당은 공사 중이라 동제에 임시 분향소가 있다. 정경달님이 선고를 했다. 유세차 단군기원 4349416일 이배사 통영지부에서는 장군이 수군 재건을 위하여 걸었던 그 길을 답사 하려고 합니다. 무사히 완주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 흥 출언제나 느끼는 감정이이지만 곁에 충렬사가 있어 참 좋다. 마음이 편안해 지고 차분해지는 감정이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언제 비가 올지 몰라 우산과 우의를 준비했다. 사천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석주관으로 향했다. 일행을 내려놓고 종착지인 구례읍사무소로가 차를 한 대 두고 시작점에 왔다. 석주관은 전남의 수군재건로의 시작점이다. 장군은 전라도로 들어서 처음 이 석주관에서 구례현감 이원춘을 만났다. 석주관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으며 방어의 요충지로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석주관산성을 쌓고 구례현감 이원춘에게 방어 하도록 지시했다.

 

정유재란 당시 왜병 수만 명이 들이닥치자,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은 의병을 모아 적을 여러 차례 기습,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구례가 함락되고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롯하여 이정익(李廷翼)한호성(韓好成)양응록(梁應祿)고정철(高貞喆)오종(吳琮) 등이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화엄사의 승병 153명의 지원을 받아 석주관에 집결, 왜병에 저항하였다.

 

이듬해인 1598(선조 31)하동으로부터 왜병이 큰 무리로 내습하자 당시의 의병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 뒤 1805(순조 5) 조정에서 7인의 의사(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 종)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으며, 1946년 지방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 의사들의 공훈을 추모하였다. 사적 제385호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으며 이원춘을 비롯한 8기의 가묘와 제단이 있다.

 

섬진강을 따라 연두색 녹음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걸었다. 차량이 자주 다녔지만 연두가 주는 편안함이 참 좋았다. 전망 좋은 곳에 올라 경치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우측의 절개지 철망에 심어놓은 등나무는 꽃을 피워 보라색 향연을 보인다. 강가에는 루어 낚시를 하는지 천렵을 하는지 물속에서 놀고 있다. 바다와 강은 또 다른 느낌이다. 벚꽃이 지고 벌써 어린 버찌가 열렸다. 길가에 만개한 철쭉 앞에서 휴식을 취하며 갖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논에는 보리가 아닌 풀이 가득했다. 아마도 소의 조사료로 쓰여 질 것이다. 녹색이 너무 좋아 논바닥으로 내려갔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나? 푸르럼을 간직한 이곳은 토지면 파도리 들판이다. 흐리지만 걷기에는 그만인 날씨다. 토지면 소재지에서 다슬기 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토지천변을 따라 걸었다. 구산교 건너편의 단산 마을은 아늑해 보였다. 구산교 입구에 수군재건로 현판이 있다. 천변 따라 심어놓은 두릅과 초피나무, 취나물, 머위가 봄 냄새를 풍기고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깃발이 볼을 때린다. 옆의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트랙터를 몰고나온 농부는 논갈이에 여념이 없다. 이곳 하죽 마을은 아랫대네, 바깥대내로 불려 길지로 알려져 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수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아름다워 보였다.

 

운조루(雲鳥樓)에 왔다. 운조루는 구름 속에 새처럼 사는 집이란 뜻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취했다. 운조루가 1776년 건립 되었는데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 있으며 주인 류이주는 부엌에 구멍이 뚫린 뒤주를 두어 타인능해(他人能解)라 하여 배고픈 사람들은 언제라도 쌀을 퍼 가도록 배려했다. 운조루가 난을 피해간 것은 인심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솟을 대문 입구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있다. 입장료를 받고 계신 어른에게 물어보니 할아버지가 문경세제에서 호랑이를 잡아 조정에 진상하고 그 뼈를 얻어와 잡귀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대문간에 달아 놓았다고 했다. 특이한 것은 집안에 가빈터(초분)가 있다. 이는 초상이 나면 가빈터에 3개월간 모셔 놓았다가 장례를 치른 것이다. 사랑채에는 통영소반도 보였다.

 

곡전제가 있다. 곡전제는 1929년 박승림이 길지를 찾아 이곳이 금환락지라 여기고 들판 가운데 집을 지었다. 금환락지는 금가락지를 떨어뜨린다는 말인데 즉 선녀가 가락지를 풀고 몸을 허락 한다는 뜻으로 길지를 말한다. 7천석꾼인 박승림이 지관을 데리고 길지를 찾아 들판 가운데 금가락지처럼 높은 담을 두르고 집을 지었다가 곡전 이교신이 인수하여 현재 5대째 살고 있다. 원래는 653칸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년에 인수당시 동행랑과 중간채를 팔아 훼손되었다가 현재 소유주 이순백이 19981월 새로이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라 이름 지었으며(551칸 연못(洗淵:세연)을 확장하였다. 구례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2003-9) 집안을 들어서면 곡수(曲水)가 흐른다. 기화요초가 어우러져 도원의 세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측으로 들어가 누각을 지나면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 징검다리를 놓았으며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정말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이곳에서 꼭 하룻밤 머물러야겠다. 혹시 알란가 몰라 선녀가 품에 안길지?

 

곡전제를 나와 길을 가로질러 섬진강변으로 갔다. 지리산 둘레길 표식이 비교적 잘 되어있다. 용두리의 용호정으로 향하는 길은 데크를 설치했다. 섬진강변의 수달 서식지 관찰소에서 수달이 놀고 있는 광경을 상상을 하며 보았다. 용호정은 매천 황현의 제자들이 한일 합방의 울분을 달래며 시문을 짓고 매천야록을 번역 배포하는 일을 했다. 섬진강이 내려 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항일 의지를 다지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수군재건로 현판이 있다.

 

구례군 하수종말처리장 옆 강둑길을 따라 걸었다. 섬진강 보를 따라 어도가 설치되어 있는데 어도를 오르는 고기를 잡기 위하여 새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고 순리다. 섬진강가에는 연두색의 버드나무가 있다. 흐르는 강물과 연두색 뭉치는 편안한 감을 준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머릿속에 기억하자.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구례 읍내로 들어서기 전 빗방울이 굵어졌다. 준비해간 우의를 입고 길을 나섰다. 비바람이 심했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한다. 굳굳 하게 목적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 디뎠다. 비바람을 거스르기가 여간 힘들었다. 지도 어플 켜고 확인하며 손인필 비각을 찾았다. 비각이 있는 곳은 조선수군재건로 출정식공원으로 꾸며졌다. 손인필은 누구인가? 그는 전란 중 아들과 함께 군자감에서 군량미와 군수품을 조달했다. 그의 아들 손응남, 숙남과 함께 백의종군 시 장군을 극진히 모셨다. 이후 수군재건시에도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할 만큼 신뢰가 깊었다. 비각 옆의 큰 바위는 흰 줄이 길게 들어 있어 일명 백의바위라 한다. 이 바위 위에서 때 이른 감을 먹으며 작전을 논의 했을 것이다. 손인필과 손응남은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손숙남은 석주관 전투에서 순절했다. 구례현청에 도착하였다.

 

옛 현청터 임을 알리는 것은 500년 된 노거수와 복원된 명협정만 남았다. 장군은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머물렀을까? 시시각각 몰려오는 일본군을 어떻게 하면 물리칠 것인가? 그것은 병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수습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길 밖에 없었다. 수곡 손경례가에서 쉽 없이 달려왔다. 구례에 도착하니 온 동네가 쓸쓸하다고 했다. 장군이 지나고 수일 만에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여 초토화 당했다. 장군을 맞이한 백성들은 명성을 익히 들어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뒤따랐으리라 생각된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다들 컨디션이 안 좋아 힘들어 했다. 비가 많이 왔다. 오후 세시부터 온다는 비는 정경달님의 부탁으로 한 시간이나 참아 주었다. 어떡하지? 12일 계획인데……. 다들 돌아가고 나 혼자라도 걷고 싶었다. 그러나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 통영지부 회원들이 절대로 혼자 둘 수 없다며 다음을 기약하란다. 하는 수 없어 차를 타고 귀가했다. 당일 걷고 당일 운전은 무리가 따른다. 오면서 두 번 이나 깜빡 졸았다. 1달에 이틀을 투자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 절반은 성공이라 자만해 본다. 장기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연두의 세상에서 시작하여 삭풍이 불고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일까?  15.44 km  5h 05m



 

2016416일 석주관에서 구례현청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