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임진왜란 4대해전 조명(한산/부산포/명량/노량)

청풍헌 2016. 5. 8. 08:16

18회 이순신 연구소 세미나 참석기

아산 온양호텔에서 해마다 탄신일 전후에 학술 세미나를 한다. 올해는 부산포 해전을 재조명하는 특별한 자리다. 이배사에서 한 달 전 부산포 해전지를 답사 했다. 사전 학습이 큰 도움이 되었으며 4대 해전으로 자리매김하는 귀중한 자리다. 3대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었는데 여기에 부산포해전을 포함하는 것이다. 적은 본진을 처 부순 부산포 해전은 임진 장초의 부산포파왜병장만 있어 조명이 덜 되었다. 부산에서는 부산포해전이 일어났던 날(10월 5)을 부산 시민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세미나를 복기해 본다.

(무수한 사람들이 해전을 분석했을 것인데 또 무엇이 할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한산해전의 주요 경과와 역사적 의의 이민웅

충격적인 것은 한산해전에 대한 단독논문이 정진술 교수가 쓴 한편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세계4대 해전의 하나라고 자랑하는 한산대첩에 대한 논문이 한편이라니 충격적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순신은 15912월에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여 전쟁준비를 했으며 전라 우수사인 이억기는 15921월에 원균은 15922~3월에 부임하였다. 통상 수사가 부임하면 보고를 받고 진관을 순시한다. 전임자가 잘 정비하고 훈련 되었으면 즉시 출동이 가능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수군과 병참의 출동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1차 출동에는 참전하지 못하고 2차 출전에 참여했다.

 

1차 옥포대첩으로 자신감을 얻은 조선수군은 2차 사천, 당포, 당항포 까지 승리를 한다. 일본 본국까지 패배 소식이 전해지고 한성까지 올라간 일본 주력부대는 남하하여 조선수군을 격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하했다. 공명심에 사로잡힌 와키자카는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를 따돌리고 낙동강 하구를 떠나 견내량까지 진격 했다.

 

3차 출전에서 이억기 함대는 사전에 참여하여 합동 작전을 숙의 했다. 74일 저녁 무렵 도착하여 다음날 5일 서로 약속 했다는 기록이 있다. 7일 당포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목자 김천손의 정보로 적선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제보를 받는다. 전라좌도 24(거북선 2척 포함), 전라우도 25, 경상우도 7척등 도합 58척과 오키자카의 73척과 격돌했다. 견내량을 수심이 얕고 전세가 불리해지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을 가므로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섬별 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적을 유인한 부대가 어느 부대인가가 논쟁이 있었다. 통영에서는 그곳 물길을 가장 잘 아는 경상 우수영 부대의 이운룡이나 우치적이 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반면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 의하여 방답첨사 이순신이라 비정한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며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을 것으로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억기는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 버리고 갑니까? 하고 외쳤으나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조경남의 난중잡록1 임진년 상 이긍익 연려실기술 권15. 선조 조 고사 본말에 실려 있다. 이는 지정토론 시간에 질문 되었다.

 

바다 가운데로 나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려서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 승자총통 등의 총통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트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여러 장수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을 다투어 돌진 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뢰 같아서 적의 배는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는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근거리에서 포격 하여 당파하면 호로쿠비야(불화살)로 분멸했다. 일본 측의 피해정도는 이분 의 행록에 9천명이라 기록되어있다. 견내량에 정박한 연합함대는 탐망꾼으로 부터 안골포에 일본선박 40여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진격하니 42척이 머물러 있어 학익진과 장사진으로 번갈이 가며 공격했다. 20여척을 쳐부수고 사상자는 부지기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주력함대가 대패 하면서 조선수군과의 대결을 회피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 일종의 명령서신)에는 도도 다카도라와 간 미치나가 등과 협력하여 육해군은 배의 척수에 따라 지시대로 당책산(거제도)에 성을 쌓아 그곳에서 싸울 것이며 경솔히 싸움을 걸면 안 된다고 명 하셨다.”(고려 전선기 고려 해전기)

 

한산해전의 역사적 의의는 첫 번째 초기 전황과 관련 승리의 시점과 의미가 특별 했다. 둘째 일본 주력 수군과 맞장을 떠 거둔 통쾌한 승리다. 셋째 이 해전으로 남해안 재해권을 완전 장악 했으며 일본군의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회피 위축시켜 침략을 저지하였다.

 

조선 통합부대는 한산대첩의 결과로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 장악하여 일본군의 수륙 병진 정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본 수군이 더 이상 해전에 나서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제압한 것이다. 역시 한산대첩은 중요했다. 전세를 역전시킨 역사적인 해전이다. 그 장소가 통영 앞바다며 이후 한산도에 주둔한 계기가 되었다. 자랑스러운 한산해전이다,

 

병법의 관점에서 본 부산포 해전 임원빈

부산포 해전은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핫한 이슈였다. 한산해전의 패배소식을 접한 도요토미는 해전을 중지하고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고 보급로를 유지 하도록 명령한다. 이 때 명나라 원병이 출병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전 했다는 소식을 접한 선조는 하삼도의 적을 공격 할 것을 지시한다, 경상우도 관찰사 김수가 양산강, 김해강 등에서 짐을 가득 싣고 도망 갈려는 행적이 있다는 정보를 준다. 23일간 전라 우수군 과 훈련 및 작전을 토의한 후 출항했다. 사량도 주변에서 경상 우수군 과 합류하여 명실상부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부산포를 향하여 출진 하였다.

 

동래 땅 장림포 바다 가운데에서 낙오된 왜적 30여명이 대선 4척과 소선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다가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경상 우수사가 거느린 수군들이 도맡아 쳐부수고 불태웠습니다.” 라고 했다. 다음날 도망간 일본군을 추적하기 위하여 서쪽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수색 섬멸작전을 펼쳤다. 몰운대를 지나 화준구미에서 5척을, 다대포에서 8, 서평포에서 9, 절영도에서 2척을 격파했다. 사실 적들은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으며 집중포화로 당파 분멸 시켰다. 드디어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포로 진격해 들어갔다. 초량목에서 4척을 분멸한 연합함대는 장사진으로 총 공격을 감행했다. 부산포에는 어떤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끝 세 곳에 약 470여척이 정박해 있고 산위에 있던 적들은 총통과 궁시로 철환과 화살을 비 오듯 퍼부었다. 이 전투에서 100여척을 쳐부수고 녹도만호 정운은 대 철환을 맞고 전사했다.

 

부산포 해전의 승리요인은 첫 번째 만전(萬全)의 원칙이다. 두 번째 군사력 집중이다. 세 번째는 주도권 확보다. 네 번째는 공세의 원칙이다. 다섯 번째는 정보 획득의 원칙이다. 전략 면에 보면 선조 임금의 지시에 의한 결전 전략 차원에서 감행된 일본군 퇴로차단 전략이다. 이에 반해 일본 구군은 도요토미의 지시에 의하여 요새 함대 전략으로 일관하며 나오지 않고 배를 버리고 방어전을 폈다. 전술 면에 보면 이미 정형화된 당파 분멸 수순이다. 장사진에 의한 돌격 전술로 병행하였다. 부산포에는 육지의 산 위에서 싸우는 적들과는 원거리 사격전이 되었다. 부산포 해전은 이순신이 수군만 가지고 치른 해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해전이자 가장 큰 전과를 올린 해전이다. 일본군의 본거지를 공격함으로 이후 침략전쟁을 수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일본 지상군 부대가 남하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도요토미가 직접 건너와 전쟁을 지휘 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부산포 해전은 조선에게도 일본에게도 이후 전쟁 수행의 방향과 전략을 수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해전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해전이다.

 

명량해전 연구사와 주요 쟁점 정진술

명량해전은 괴멸된 조선 수군 13척으로 일본군 133척을 격파한 전설적인 해전이다. 명량해전의 주요 관점에 대하여 살피면 일본 함선의 수는 문헌에 따라 130~ 5-6백척 까지 다양하게 기록되어있다. 이순신의 정유년 일기에 나오는 133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판단된다. 충무공 가승의 행록에 133, 충무록에 133척이 기록되어있다. 명량해전 전후 이순신 함대의 전선 수의 변화는 정유년 회령포에서 10척 수습한 후 벽파진에서는 12, 고군산도에서 13척 발음도에서는 15척 이었다. 조석과 조류는 명량해전에 미친 영향이 크므로 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하게 연구했다. 최근의 연구 성과로 볼 때 낮의 만조시간은 12:30전후, 오후 만조시간은 18:30~19시 까지다. 해전 시각은 오전에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해전이 끝난 시각은 오후 간조 무렵인 18:30~19사이로 보았다.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기적적으로 싸워 이겼기 때문에 여러 승리의 원인이 있으나 철쇄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등장한 설화로 정리 되었다. 이순신 함대가 사살한 적장 마다시(馬多時)는 근세 일본 연구서를 종합하면 래도통총(來島通總)으로 판단된다, 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가장 이견이 많은 부분이다. 명량 협수로 북서쪽 출구와 우수영 수로 양도 동쪽바다, 명량 협수로의 북서쪽 넓은 곳 양도 서쪽 바다로 나눠져 있다. 발제자는 양도 동쪽 우수영 수로로 동의했다.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은 첫째 조류, 협수로의 지형물, 피란선 의병의 이용 등 이순신의 전략전술이다. 둘째는 전선의 전투력 증가와 전투의지의 고양 등 이순신의 지휘통솔력이다. 셋째는 조선 함선의 성능과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월성이다.

 

노량 해전과 이순신 전사 상황 검토 제장명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과 진 린이 이끄는 명 수군은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일본군에 대승은 거두었다. 그리고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전사 하였다. 노량해전은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 승리로 이끌어 일본에 복수적 의미가 있으며 주변국에게 조선수군의 우수성을 크게 각인 시켰고 동시에 명 수군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이 해전의 큰 승리는 전쟁의 참상에 망연자실해 있던 조선백성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이 있었다. 당시의 자료를 검토하고 결합하면 전사 해역은 관음포 입구 부근이며 전사 시각은 아침 동틀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이순신은 일본군이 쏜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았으며 그는 갑옷을 입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여기서 이순신이 자살 했는지 전사했는지 여부가 관건이 된다. 당시의 상황을 봐선 자살했다고 보기 어렵고 우발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적탄에 맞은 것으로 보인다. 세간에서 이순신의 자살을 주장하는 것은 이순신의 당시 심정을 헤아려 배려심에서 나온 문학적 표현으로 생각 된다. 그리고 이순신이 전사한 후 사후 처리와 지휘는 기함에 타고 있던 군관 송희립이 주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명군과의 협조는 손문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정 토론자는 현장에서 뛰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하여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였다. 한산대첩의 이종애(통제사), 부산포대첩의 전재문(가덕첨사), 명량대첩의 이연숙(해남현감), 노량해전의 서재심(이순신 학교)이다. 사회는 tv에 자주 등장하는 김경수 교수님이다. 한산대첩에서 적을 유인한 병력은 이운용이나 우치적 같은 경상 우수영 병력이 아닐까 하는 견해에 대하여 이민웅 교수는 기록에 의하여 방답첨사 이순신이라 단정했다. 부산포 해전의 질문은 첩보 입수 여부와 정확한 출전로와 귀항로의 검증요구에 대하여 부산포 해전은 선조 임금의 작전 명령서에 의하여 출동 했으며 순찰사 김수의 첩보가 있었다. 귀항로는 가덕도 북변 서쪽의 천성항으로 생각된다. 명량해전에서는 철쇄설과 민초들은 재조명할 의사에 대하여 철쇄설은 후대에 나타난 설화로 정리하며 민초들의 활약은 향선을 의병으로 이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노량해전은 철수하는 적은 그냥 두어도 될 것인데 죽기로 싸운 이유와 자살설, 이 전투로 조명 연합군이 얻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절대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로였으며 명은 청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제조지은의 분위기로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다. 자살설에 대하여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2 실기(實記)에 김덕령의 심정을 대변하여 문학적인 표현이라 생각된다.

 

18회 이순신학술세미나 임진왜란 4대 해전에 참여한 후 자료집을 요약해본다.


참고자료:임진왜란 4대해전(한산/부산포/명량/노량)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제18회 학술세미나 자료집 

참고자료:임진왜란 4대해전(한산/부산포/명량/노량)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제18회 학술세미나 자료집 


2016.4.19(화) 온양관광호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