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백석평전

청풍헌 2016. 8. 3. 15:42

통영과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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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박경련과 첫 만남

19357월 어느날 백석은 친구 허준의 결혼 축하 회식에 초대 받았다. 장소는 허준의 외할머가 운영하는 낙원동 여관이다. 신현중은 백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오늘 분명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있게 될 거야이화고보에 다니던 박경련은 외삼촌인 서상호의 가회동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만난 박경련은 까만 머리에 가르마를 타 정갈하게 보였고 가름한 얼굴에는 두 눈이 유난히 빛났다. 나는 조선 여자의 전형을 만나고 있는 거야. 내 운명의 날이 바로 오늘이야. (p72)

 

193512월 조광 12월호에 통영을 발표한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넷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에 생선 가시가 잇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1936221일자 조선일보에 산문 편지를 발표했다. 남쪽 바다 가 어떤 날근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 하였습니다. 머리가 깜아코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알어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 어머니와 둘이 동지섯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날근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가티 살어 왔습니다

 

첫 번째 통영방문

저문 유월이 양력 7월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현중의 여동생 신순영과 결혼한 허준과 함께 백석을 데리고 통영으로 갔다.

 

1936123일자 조선일보에 두 번째 통영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구마산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짭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도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 젓갈이 좋고...(중략) 넷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두 번째 통영방문

19362월 초순 두 번째 통영 방문에는 신현중이 동행했다. 신문사에는 마산, 통영, 삼천포 등 남해안을 취재여행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마음먹고 일주일간 출장을 간 것이다. 구마산에서 통영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백석 일행은 포구 근처 오동동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여보게 현중 이집 주인장 땋이 ka 곱게 생겼네. 내 눈에는 난이로 보인단 말이야.” 이튿날 네 시간이나 배를 타고 통영에 도착한 백석은 한숨을 쉬었다. 박경련은 경성으로 간 뒤였다. 그 말은 전해준 이는 외사촌 오빠인 서병직 이었다. 서병직은 신현중과 백석을 충렬사로 안내햇다. 명정골 386번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통영에 사흘간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고성을 거쳐 삼천포에 다녀왔던 고성가도삼천포는 그때 쓴 것이다. (p101)

 

남행시초3

통영장 낫대 들었다. 갓 한 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단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 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니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서병직에게- (p108)

 

세 번째 통영방문

1936년 다 저물어 가는 어느날 백석과 허준은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세 번째 통영 방문 이었다. 통영에 있는 서병직에게 미리 전보를 보내 만나자고 해 놓았다. “박경련에게 청혼하러왔소. 그녀의 어머니께 좀 전해주시오박경련의 어머니 서씨는 오빠 서상호에게 백석에 대하여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서상호는 신현중에게 물어보니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말해 혼사는 깨졌다.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 생활에 매진한다.

 

1937년 봄은 잔혹했다.

백석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았던 통영의 박경련이 그와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함흥으로 날아들었다. 신현중은 47일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약혼녀였던 김준연의 딸 자옥과 파혼하고 통영의 경련을 아내로 맞아 들인 것이다.

 

백석의 연인 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거물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다.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 사찰 길상사가 완공 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백석 연구자 이동순의 주선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백석의 여인답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백석연보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번지 백시박과 이봉우 사이 장남으로 태어남.

1918년 오산소학교 입학

1924년 오산 소학교 졸업후 오산학교 입학--> 오산고등보통학교로 학제 개편됨.

고당 조만식, 김소월, 벽초 홍명희, 이중섭, 황순원 등이 동문임.

1945년 해방당시 만주의 단둥세관에 근무했음. 이후 신의주를 거쳐 평북 정주로 돌아옴.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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