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향토사

아늑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청풍헌 2016. 3. 27. 10:59


2016년 향토사 강좌가 시작 되었다. 원장님의 마지막 강의가 될 듯하다. 원장직을 수행하시며 강의를 한다는 것은 일정과 건강상 여러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올해만 계획 되었다. 이 주옥같은 강의를 누가해 줄 것인가? 다시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마디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나 직장관계로 한계가 있다. 들었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기록하고 복기한다. 거북선 앞 문화마당에 모였다. 통영은 통제영의 마을이다.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 하여 방어하고 훈련하던 남방의 최 일선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선소다. 통제영 8전선을 계류하던 곳이며 중영선소는 현 국민은행 자리다. 이후 매립으로 이곳이 문화마당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통영의 정체성은 통제영이다. 통제영은 항구가 있어야 존재한다. 각종 전함들을 거느린 조선수군의 본영이다. 통제영을 복원 하면서 항구를 매립하고 이름도 다르게 지었다. 이름은 한번 정하면 바꾸기도 힘들다. 통제영 8전선이 계류되어 있었던 선소다. 즉 병고, 화포청, 수항루(선소문)등이 있었던 곳이다. 현대의 해군작전사령부에는 보급창고가 있으며 탄약고, 병참 물자가 즐비하게 창고에 가득 하므로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 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병선마당이라 했더라면 통제영의 정체성과 걸 맞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항구의 정체성이 살아야 한다. 최근 마산지방해운항만청에서 강구안 친수 공간 재배치 작업을 계획하며 강구안 입구에 15m높이의 다리를 설계 했으며 화장실 사이가 좁다고 매립을 한다 하는데 이는 통영의 정체성인 항구를 없애는 것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항구가 살아야 통영이 살 수 있다. 통영 항은 오목한 단지 형태의 작은 항구다. 과거 수책(바다의 대문)을 달아 통제를 했었다. 아늑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이곳에서 뭇 생명이 태어나며 지금도 잉태하고 있다. 자궁이 막히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불을 보듯 뻔하다. 고깃배가 드나들고 비릿한 갯냄새와 생선 말리는 곳, 톱장수가 시를 쓰는 곳 이것이 정체성이다. 사실 강구는 강어귀를 말한다. 즉 협의의 통영 항이다. 관창골에서 흘러내린 내와 시구문에서 흘러내린 내, 선창골에서 흘러내린 내가 모이는 곳이다. 광의의 통영항은 망일봉에서 마리나 리조트를 연결하는 선과 인평동 천대 국치와 미수동 광바위를 연결하는 가상의 선 범위가 통영항이다. 강구안이 살아야 통영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다. 통제영 시대부터 근, 현대사까지 관통하는 수많은 스토리는 강구안이 있으므로 가능했다. 이러한 강구를 잘 살려야 통영이 살아난다. 과거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수많은 스토리가 있다. 이승만이 왔다간 사진, 김구선생의 방문 등 해방된 조국을 찾아 충렬사를 참배하며 광복 후 건국 의지를 다졌다. 거북선에 협조가 되어 들어갔다. 거북선은 3척이 계류되어있다. 1척은 판옥선이다. 2012년 건조된 거북선에는 만재 흘수선이 표시되어있다. 목선에만 쓰는 것인지 kv라 쓰여 있다. 거북선은 2층이다, 3층이다 등등 이야기가 있다. 현존하는 거북선은 없으며 이충무공전서와 현충사에 내려오는 거북선 그림, 외국의 그림들을 참조하여 복원한 것이다, 옛 그림에 거북선에는 여러 문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려한 채색을 한 거북선은 위엄이 있으며 옛 조상들의 지혜를 본 받아 이곳 거북선에도 그림을 그려 넣자 . 뚱보 할매 깁밥집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해안선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좁은 골목이 보이는데 갱문가로 가는 해안선이다. 항남 전당포와 some 간판의 사이길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통영은 항구다. 뒷골목 살리기를 하면서 백석 시를 도배를 했다. 한국에서 가장 시랑 받는 시인 중 한 명이다. 백석이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마산으로 와서 배를 타고 통영으로 왔을 것이다. 이곳에서 자고 간 여인숙이 석전 여인숙이 아닐까 상상해보자. 이것이 스토리텔링이다. 항구의 뒷골목 이야기다. 동충과 서충의 경계에 왔다. 본시 이곳은 야트막한 산으로 오르는 작은 길 끝에는 천척루가 있었다. 이 야트막한 산을 깎아 매립을 하여 항남동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적옥(赤屋), 아까다마(홍등가)였다. 일명 청루(기생집)이다. 이중섭이 기거했던 나전칠기 강습소는 아직 그대로 있다. 시에서 매입을 해야 하는데 예산타령만 하고 있다. 물론 그 내면에는 여러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대표작을 그렸다. 함경도 고향에서 일본 유학시절 일본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고향에 살다가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 왔다. 이후 제주도로 다시 부산으로 와 가족은 일본으로 보내고 본인은 부두 노무자라 생활하다가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왔다. 유화의 대부분을 통영에서 그렸으며 풍경화이다. 통영에서 여러 문인들과 교류 했으며 술집에 드나들며 시국을 논하고 술값 대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복자네 술집, 도깨비 골목, 새미집 등이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옛 충무도서 앞이 몽돌고개다. 몽돌이 깔린 자그마한 해수욕장이었다. 이곳이 초정거리다. 일명 항남동 일번가라고도 한다. 조금 더 가면 토마토라는 간판이 있는 이곳이 통영예기조합이 있던 곳인데 당시 기생들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통영을 이런 곳이다. 이 거리는 통영의 선각자들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 시 동인지 참새를 창간한 탁상수, 수남의원의 이찬근, 김옥두 동아일보 지국장등이 살았으며 한국 최초의 여 목사 최덕지 여사와 공덕귀 여사의 모친 방말선 여사, 청마부인 권재순 여사가 살았던 곳이다, 이런 훌륭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초정이 시인의 기초를 다지는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무릇 좋은 환경이 되어야 그 영향을 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초정은 시, , , 도자감식, 전각등 만능 이었으며 서울에서 아자방 이라는 표구점을 했다. 청마 거리는 청마가 수많은 지인들과 이영도 여사에게 수천통의 연서를 보낸 우체국이 있는 거리다. 청마 흉상은 탄생 100주년 때 청마를 지키는 사람들청지사의 모금으로 흉상과 시비를 세우고 쌈지공원을 만들었다. 이 우체국이 당시의 우체국이며 충무교회의 영산장에서 통영여중을 오가며 거닐었던 거리다. 이영도는 이호우(경북 청도)와 오누이 시조시인이며 8년간 통영여중에서 수예선생을 하면서 유치환, 전혁림, 김상옥, 윤이상과 교우했다. 이후 통영 문화협회를 결성하고 류치환이 회장을 맡으며 한글 강습회, 시민의식강화, 계몽운동을 펼치며 통영의 르네상스를 꽃 피웠다. 그 사무소가 문화유치원이 있었던 영산장이다. 통영의 정문인 남문(청남루)은 이층의 홍예문이다. 이곳을 복원 한다 하니 두고 볼 일이다.

2016.3.22

 

봉선화 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은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 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남이 서누나

 

그리움 류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탑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서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통영 > 향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석평전  (0) 2016.08.03
진명,동부,문화 유치원  (0) 2016.06.20
통제사 김 영 각암비문(統制使 金 煐 刻巖碑文)  (0) 2015.12.22
숭무당 주련  (0) 2015.12.09
통영충렬사 팔사품도병풍  (0)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