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수군재건로11(열선루-군영구미)걸어서 만난 충무공은 나의 머리에, 나의 가슴에, 나의 두 발에 각인 되었다

청풍헌 2016. 12. 16. 05:54

따뜻한 봄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년도 경남의 백의종군로를 완료하고 상당한 인터벌이 있었다. 여의치 않은 해상답사를 뒤로 미루고 수군재건로를 전남도에서 고증하고 길을 연결했다는 정보를 받고 자료를 받아 차근차근 준비했다. 로고를 협조 받아 깃발에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고 두개를 제작했다. 이배사 통영지부 올해의 사업으로 승인받고 지원을 받게 되었다.♡ 


수군재건로란 무엇인가. 임진년에 침입한 일본군은 명군의 참전으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며 강화협상에 들어간다. 협상이 결렬되고 정유년 대 규모의 병력으로 재침을 하였다. 장군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군의 거짓 첩보전에 휘말려 장군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초를 당했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백의종군을 명()받아 권율 휘하로 들어가 종군하였다. 후임 통제사 원균은 조정의 무리한 출전 요구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하고 자신은 춘원포에서 전사 하였다. 다급해진 조정은 백의종군중인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수임하고 수군을 통괄하도록 했다. 칠천량에서 괴멸된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전라도 밖에 믿을 만 한 곳이 없었다. 일본군을 피하여 내륙으로 군사와 병기, 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녔던 길이 수군재건로다. 이렇게 모아진 수군으로 명량에서 기적의 승리를 이루고 더욱 힘을 모아 명 수군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다.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가만 두어도 물러갈 일본군을 한 놈도 살아 돌아가게 할 수 없다고 노량에서 전투를 치루다 전사했다. 장군의 순국과 동시에 전쟁은 끝났다. 여러 과정 중 수군재건로를 답사하며 장군의 명성과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사항을 느껴보고 직접 걸으며 생각해보기로 했다.


봄에 시작된 수군재건로가 어느듯 막바지에 들었다. 마지막이라니 허전했다. 보성 땅이 이순신에게 무엇인가? 한낮 스쳐지나가는 길목인가? 방진은 얼마나 이곳에서 근무를 했었나? 보성읍 선생안에는 있기나 한지? 전남의 가고 싶은 섬 프로젝트는 알고 있는데 보성의 이순신 프로젝트는 내 생각으로는 뭔가 약해 보였다. 지난10차 답사 때 확인한 조양창터와 양산항의 집 정도다. 물론 이 두 곳은 과거 전혀 조명도 안 되었으며 방치되고 있었다. 조양창터, 양산항의 집, 열선루, 백사정, 군영구미로 이어지는 장군이 거쳐 간 유적지를 조명하고 발굴 확인을 하는 중심에는 열선루님이 계셨다.


열선루는 어디인가? 樓와 亭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비변사인방안 지도와 호남절의록, 고지도, 기타 모든 문서를 조사하여 추적했다. 또한 유구도 다수 나왔다. 기초석과 활주석이 발견되어 군청 앞마당에 전시해 놓았다. 기초석의 크기를 가늠해보니 세병관의 기초석과 거의 같았다. 그만큼 웅장하고 거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열선루는 객관의 북쪽 취음정 자리에 있었다. 지금의 보성군청과 초등학교 사이 교회 언덕배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복원은 공원 가장 높은 곳에 세울 것이라 한다. 열선루에서 받은 선조의 유지가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금신전선 상유십이로 대변되는 장계를 올리고 밤새도록 참모들과 술을 마시고 대취한다. 당시의 장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무기와 식량을 말에 실어 보내고 군영구미에서 배설의 배를 인수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백사정, 군영구미로 가는 길은 봇재를 넘는다. 봇재는 과거 보부상들이 봇짐을 지고 고개를 넘나들던 곳이다. 도로를 두고 임도를 택했다. 임도로 가는 길은 사전에 조사를 하여 약간 긴장하며 찾아갔다. 다행히 잘 도착하여 올랐다. 임도는 한창 개발 중에 있으며 편백숲도 있었다보성은 녹차 밭으로 유명하다. 고온 다습한 기온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녹차를 심고 생산했다. 하동, 제주, 보성이 각각의 특색을 자랑하며 발전하고 있다. 편백 숲을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차 박물관과 세계 차나무 박물관이 있다. 빛 축제를 위하여 나무란 나무에는 죄다 꼬마전구를 감았다. 야간에는 화려하게 빛날 것이나 나무에게는 고통일 것이다. 너무 인간의 잣대로만 사는 게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봇재 가든에 미리 예약을 하여 들어가 꼬막 비빔밥을 먹었는데 계산을 열선루님이 했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남명손서님이 어렵게 구하여 공수한 동래산성 막걸리는 꿀맛 이었다.저물어 가는 태양의 윤슬은 영천 저수지와 멀리 바다에까지 반짝이고 녹색 융단이 깔린 겨울의 녹차 밭은 과히 절경이었다.


꼬불꼬불 고갯길을 걸어서 율포 해변으로 왔다. 여기는 녹차해수탕이 유명하다는데 ……. 솔밭해수욕장에는 커다란 닭 모양의 구조물이 있다. 아마도 빛 축제 관련 조형물일 것이다. 명교마을 백사정으로 이동했다. 명교마을은 오랜 역사가 있는 마을임이 지표조사에서 확인 되었다. 단단한 백사장과 수량이 풍부한 우물은 말을 쉬게 할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추운날씨와 오랜 걸음으로 지쳤다. 군영구미로 가는 거리는 점점 줄어드는데 체력도 함께 고갈되었다. 개울을 건너 질러가고 싶은 판단에 둔치로 들어섰지만 다리가 없다. 나무 아래에 원형이 잘 보존된 고인돌을 보았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 군학마을에 들어섰다. 이 마을은 지표조사를 할 때 많은 옛 지명이 이름도 모르고 쓰고 있었다고 했다. 잔존 성벽도 있었으며 성끝, 진두, 사장, 휘리포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이 마을의 노거수는 수령이 제각각이다. 820, 520, 480년 등이다. 다시 일기를 살펴보자. 817일 맑음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백사정에 이르니 말을 먹였음.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마음대로 손은 대서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이 약속을 어김 일기에 나타난 군영구미는 군량창고가 있는 해안가 진성이었다. 감관과 색리가 근무하는 관청이 있었으며 제법 규모가 있는 진성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군영구미에서 배를 타고 회령포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육로로 이동했는지 의문이 든다. 다음날 일기를 살펴보면 818일 맑음 늦은 아침에 곧장 회령포로 갔음.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음. 회령포 관사에서 잤음.으로 기록했다. 장군이 군영구미에서 향선을 타고 이동했는지 육로로 이동했는지 이 일기 한 줄로는 추정하기 힘들다. 전남도에서는 향선을 타고 이동했다고 고증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마지막 안내판에 섰다. 감회가 남달랐다. 오랫동안 감흥을 느끼고 싶었다. 막걸리라도 한잔 놓고 회포를 풀고 싶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나만 그런 감정인가? 날이 어둑해지고 돌아갈 길이 바빠 이런 감정은 사치인가? 서운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하며 아무튼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한편으로 내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희열을 느낀 수군재건로였다. 걸어서 만난 충무공은 나의 머리에, 나의 가슴에, 나의 두 발에 각인 되었다이 프로젝트가 무사히 완료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협조해준 이배사 통영지부에 그 공을 돌린다. 매 회 힘을 실어주신 고상안 회장과 통제사, 멀리서 참석하신 부산지부장 남명손서님과 일휴당님, 경기지부의 동래부사님과 주논개님, 마지막 걸음을 함께한 열선루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 외 후기를 응원해주신 카페회원님들 모두 감사 합니다.

 

2016. 12. 10 이배사 통영지보 당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