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책 이야기

윤이상 평전

청풍헌 2017. 3. 8. 22:38

윤이상 평전

 

올해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이다. 윤이상은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궁금했다. 때 마침 윤이상 평전이 출간되어 봄날의 책방에서 구입하여 읽었다. 먼저 등장 인물에 밑줄 그으며 따로 정리할 것이다. 또한 작곡한 작품을 정리할 것이다.

거장의 귀환 윤이상 평전은 박선욱 작가가 집필했으며 도서출판 삼인에서 출간했다. 2017125일 초판 1쇄를 펴냈다. 책은 5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 첫 단추, 2부 젊은 날, 3부 유럽에서, 4부 동백림 사건, 5부 불멸의 여정으로 편집되어 있다.

목차를 보면 책의 줄거리를 대략 알 수 있다. 목차와 줄거리를 대략 살펴본다.

 

1부 첫 단추

 

1장 경계에서 큰 평안으로

윤이상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쓰 내려갔다. 1995113일 오후 420분 트럼펫 소리를 듣고 나서야 윤이상의 얼굴이 평안해졌다. 그는 이제 희미한 오후의 햇살을 거두어 드리고 있었다. “살아생전에 이미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혔던 윤이상, 78세로 타계하다.”

2장 상처 입은 용

윤이상은 산청에서 태어나 2살 때 도천동으로 왔다. 선비 시인인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 사이에 태어났다. 태몽에 커다란 용 한 마리가 지리산 등성이로 나아 오르려 했다. 하지만 하늘높이 날아오르지 못하고 구름 속에서 몸부림 쳤다. 괴롭게 뒤척이는 용은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태몽에 의하여 상처 입은 용이 되었다.

3장 음악의 근원

어릴 적 통영 도천동의 풍경이 음악의 근원이었다. 바닷가의 무당이 굿하는 소리, 당산제, 오광대 등등 통영의 풍속과 문화와 환경이 자양분이 되었다. 특히 밤바다에서 낚시하며 느낀 특별한 감정이 음악의 근원이 되었다.

4장 풍금

통영보통학교에서 만난 풍금과 노래는 음악에 대한 꿈을 꾸는 계기가 되었다. 명창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커다란 인상을 받았다.

5장 첫 번째 작곡

봉래극장에는 늘 문화의 향기가 깃털처럼 떠다니고 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여러 악기가 앙상블을 이루는 경음악 형식의 곡 하나를 완성했다. 이 곡이 봉래극장에서 연주 되었다.

6장 도전

보통학교 학적부에 언어 명료하고 자세 태도가 훌륭하며 연구심이 풍부한 어린이로 창가에서 특출한 수재로 두뇌가 뛰어나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상업학교에 진학한 윤이상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서울로 가출을 하여 최호영을 만나 음악공부를 하였다. 다시 통영으로 와 아버지에게 상업학교에 가겠다는 조건으로 일본 유학을 허락 받는다. 오사카 음악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보통학교 동창인 최상한을 만나 함께 생활한다. 최상한은 윤이상을 상처 입은 용으로 이끈 인물이다.

7장 일본유학

화양학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1937년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을 출간했다. 1939년 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해방 직전 귀국하였다.

8장 항일운동

1944년 징집되어 군부대 쌀 창고 배치되어 근무 중 투옥 되었다가 풀려나 경성으로 떠났다.

 

2부 젊은 날

 

1장 해방

친구 이상용에게 부탁하여 가짜 신분증으로 인쇄소에 근무한다.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도장집을 하던 김상옥을 만난다. 결핵에 걸려 병원 생활 중 해방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2장 통영문화협회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수많은 정당이 이합집산 되는 가운데 실익이 되는 일을 찾기 위하여 통영으로 귀환한다. 1945915일 류치환, 김상옥, 김춘수, 전혁림, 정윤주등과 더불어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한다. 교도부, 문예부, 연극부, 음악부, 미술부를 두고 계몽활동을 벌렸다. 10월 중순 미륵산 계곡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화가 하태암, 극작가 박재성, 작곡가 최상한,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한글학자 옥치정 , 국어학자 김용오, 시인 류치환, 화가 전혁림, 문화운동가 정명윤 열두명이다. 10월 초 미 군정이 들어서며 안정이 되었다.

3장 고아들을 돌보다.

해방 후 귀환자들의 대책이 전무하고 특히 고아문제가 심각하여 친구 이상용과 함께 부산으로 갔다. 미군부대의 도움으로 가덕도에서 고아들을 돌보다 부산으로 나와 고아들을 돌보다 그만 두었다.

4장 부산사범학교에서 싹튼 사랑

1947년 정윤주, 최갑생, 최상우 함께 통영현악 4중주를 만들어 활동 하다가 다시 제1바이올린 탁현수, 2바이올린 최상한, 비올라 박기영, 첼로 윤이상 으로 바뀌었다. 1948년 봄 통영여자고등학교에 취업하여 각 학교의 교가를 작곡 하였다. 다시 부산 사범학교로 직장을 옮겨 작곡에 열중 하다가 결핵이 악화되어 3달 동안 요양 하였다. 부산사범학교 국어선생인 이수자를 만나 열애 끝에 결혼한다. 윤이상의 가곡집 달무리가 출판 되었다. 다섯 편중 두 편은 김상옥의 시에 윤이상이 곡을 붙였다.

5장 전란기의 음악활동

6,25 동란이 터지자 군악대에 근무 했다. 특히 아동문학가 김영일이 쓴 가사에 곡을 붙여 국민학교 새 음악을 발간하였다. 또 전시 노래책 소년 기마대를 발행했다. 얼마 후 부산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고향친구들과 함께 보름회를 조직 하여 첫 사업으로 월북한 최상한의 가족을 돌보았다.

6장 성북동 시절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하고 양정고등학교에 근무를 하다 건강 악화로 그만두고 여러 대학에 출강했다. 첼로 소나타 1, 현악 4중주 1을 완성하고 아들을 얻었다.

7장 비평의 시대

1955226일 한국 작곡가협회가 주최한 작곡발표회에 현악 4중주를 발표하고 혹독한 비평을 당한다. 반론으로 칼럼을 동아일보에 게재하여 호평을 받았다.

8장 도약

대학 강의와 창작활동을 꾸준히 병행했다. 현악 4중주 1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결심한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유학했다.

 

3부 유럽에서

 

1장 파리유학

도쿄를 거처 홍콩, 테헤란, 앙카라를 거처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유학 중 지식의 갈증으로 독일 블라허 교수아래 공부하기 위하여 파리를 떠났다.

2장 독일 유학

서베를린 음악대학 학장인 블라허 교수에게 지도를 받았다.

3장 존 케이지와의 만남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하기 강습회에서 백남준을 만난다.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제는 기상천외한 전위적인 음악도 많았다. 여기서 윤이상은 동아시아의 전통과 철학, 한국적인 색채를 전위 주의적 음악 언어와 결합 하는 작곡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4장 졸업시험 합격과 다름슈타트 입선

다름슈타트 출품작으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12음 기법으로 작곡 하고 있었다. 졸업시험에 합격하고 다름슈타트에 출품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입선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의 가우데아무스에 출품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도 입선했다. 당시 윤이상의 조국관은 역사적인 긴 안복에서 볼 때 민족은 창공과 같이 영원한 것이고 정권, 이념, 사상은 활엽수와 같다였다.

5장 두 개의 데뷔부대

다름슈타트에서의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대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빌토벨에서 연주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도 호평을 받았다. 이후 현악4중주 3을 제34회 국제현대음악제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6장 아내와의 재회

다름슈타트와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입선으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아내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7장 주요음

1961년 다름슈타트에서 초연된 교향악적 정경은 동양악기의 전통적인 연주방식을 서양악기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교차적 음향도 실험적인 음악 이었다. 급진적인 기법을 완화하여 로양을 작곡하여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8장 사신도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에서 최상한을 만나게 방북을 권유받고 사신도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몇 가지 조건으로 방북한다. 북한에서 강서대묘를 방문하여 1400년 전의 시간을 뛰어 넘은 사신도를 보고 가슴에 담아온다.

9장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와 예악

유동오 연꽃속의 진주여! 등을 작곡하고 호평을 받는다. 도나우싱겐 음악제에 연주할 음악을 부탁받고 예악을 작곡했다, 류퉁의 꿈이 베를린 예술제에서 초연되고 도나우싱겐 음악제에서 예악이 초연 되었다. 예악의 초연으로 요제프호이슬러는 윤이상을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유럽에 현존하는 5대작곡가라고 평했다. ”통영바다는 윤이상의 상상력에 무한한 돗을 펼쳐 주었다. 밤마다 낚시를 홀로 다니면서 우주의 음을 캐냈고 수평선 너머로 두둥실 솟아난 수많은 오징어잡이 배들을 보면서 음의 역동성을 가슴속에 간직했다. 뱃사람들이 부르는 구성진 뱃노래, 민요와 남도창, 판소리 등을 통해 구성진 우리가락의 풍요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였다. “

 

4부 동백림 사건

 

1장 사보이 호텔의 납치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 수교로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3선 개헌을 비롯한 676.8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계속되자 공안정치를 계획 하였다. 중앙정보부의 유혹으로 사보이 호텔에서 대사관으로 납치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다. 일본을 거처 남산 중앙정보부에 도착했다.

2장 중앙정보부 고문실

가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했다. 하지만 최덕신 대사에 대한 자백을 거절하고 재떨이로 머리를 쳐 자살을 시도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진이다.

2장 감옥 안의 견우와 직녀

중앙정보부에서는 이수자를 대사관으로 불러 한국으로 납치 감금했다. 감옥에서 부부는 만나 서로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3장 나비의 꿈

감옥에서 창작열이 불타올라 희극 오페라 나비의 꿈을 쓰고 있었다. 친구 임원식의 눈물겨운 구명운동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4장 거대한 연대

독일신문에 윤이상이 강제 납치되었다는 보도가 실리기 시작했다. 윤이상의 독일 친구들과 독일 정부까지 나서서 구명운동을 했다. 독일의 각 신문에 호소문과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최종심에서 징역10년을 선고 받았는데 이 때 윤이상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독 사절단이 도착했다. 5억 마르크의 차관을 담보로 협상을 벌려 1969225일 석방하기에 이른다. 나비의 꿈은 다시나비의 미망인으로 태어나 국제사회가 거대한 한 덩어리의 연대를 이루었다.

 

5부 불멸의 여정

 

1장 새로운 출발

풀려난 윤이상은 독일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두 개의 단막 오페라 류퉁의 꿈나비의 미망인의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다시 뮌헨 올림픽 개막을 위한 축전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받고 심청전을 구상했다.

2장 뮌헨에 울린 심청의 노래

197281일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된 뮌헨 올림픽이 개막 되었다. 2막짜리 오페라인 심청전은 대 찬사를 받았다. 서울신문사 주최 음악회에 초대되어 준비하던 중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져 귀국을 포기했다.

3장 해외 민주화운동

동백림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인 각성을 하게 된다. 김대중 석방 운동을 벌렸으며 음악회로 호소하고 도쿄에서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을 창립하고 유럽본부 의장을 맡는다.

4장 음악으로 쓴 자화상첼로 협주곡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윤이상의 인생 역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해하는 어떠한 독제체제도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이라고 호소한다.

55월에 바친 교향시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까지 활발한 작곡 활동을 한 윤이상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광주여 영원하라대관현악곡을 작곡했다. 이후 방북하여 북한에서도 광주여 영원하라공연하여 김일성에게 호평을 받았다.

6장 민족의 가슴에 바친 교성곡

김대중 석방운동에 매진하면서 광주여 영원하라를 여러 곳에서 연주하여 광주 민주화운동을 알렸다. 북한 국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지도로 폴란드 현대음악제에서 클라리넷 협주곡교향곡 1을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설립되고 연구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87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교성곡을 작곡하여 북한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5편의 교향곡은 각 편마다 메시지가 담겨있다. 1988년 리하르트 포 바이체커 대통령으로부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7장 통일을 위한 음악축전

윤이상은 남북 합동 음악제를 제안하여 범민족 통일음악회를 평양의 2.8문화회관에서 열었다. 이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90‘송년통일음악회가 열렸다.

8장 지상의 마지막 발걸음

법민족 통일음악회 후 병이 악화되어 가료 중에도 창작열을 불태워 여러곡을 작곡 하였다. 이때 한국에서 윤이상 음악제가 1994년 가을로 예정되어 방한을 추진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홍구 국무총리의 답신에 전향을 밝히라는 편지내용에 분개하며 방한이 무산 되었다. 199412월 하순 고향바다를 보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현해탄을 건너 공해상에서 고향 통영바다를 생각하며 가슴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랬다. 1995113일 오후 420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묘비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윤이상은 남한과 북한 ,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에 몸담아온 특이한 존재였다. 는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사이를 거닐었다. 뿌리와 과정이 다른 두 세계의 문화 사이에서 사유의 뜨락을 넓혀갔다. 빛깔과 무늬가 서로 다른 동양과 서양의 음악 사이에서 창조의 고뇌를 끌어안은 장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생전의 그는 이데올로기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족은 저 푸른 창공처럼 푸르른 것이다.” 라고 말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더러움이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

 

거장의 귀환 윤이상 평전 박선욱 작에서 발췌

2017.3.8.

 

발자취

산청-도천동-보통학교-일본-통영 화양학원-일본유학-귀국-해방-통영문화협회-고아원-통영여자고등학교-부산사범학교-이수자와 결혼(국어선생)-성북동-양정고등학교-대학 출강-파리유학-서독 유학-다름슈타트 입선-방북(사신도)-도나우싱겐 음악제와 예악-납치 구금-징역10-구명연대-석방-뮌헨 올림픽 심청전-해외민주화(한민련)-김대중 석방운동-대공로훈장-범민족통일음악회-방한시도(김영삼)-처염상정(處染常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