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진도 정유재란 순절묘역

청풍헌 2017. 3. 22. 13:38

 

진도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에 왔다. 뼈아픈 역사의 진실이 매장되어 있는 묘역이다. 역사는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록하고 기억한다. 하지만 실상 전투는 진도 섬 주민들의 희생 하에 이룩된 승리였다. 명량해전에 대해 역사는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32척의 협선, 또 수많은 어선들 포함)으로 적의 함대 200여척 중 명량해전에 참전한 133척에 맞서 전함 31척을 파손한 대승이며 아군의 전함은 전혀 손실이 없었고 단 2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도 2명뿐 인한 완벽한 승리로 기록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전투의 승리가 진정 승리로 끝난 것일까. 정말 희생자가 단 2명뿐이었을까? 아니다. 명량해전 전후로 수없이 많은 진도 섬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전투는 끝났지만 희생을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는 아직 남은 170여척의 왜군 함대가 전열을 정비해 다시 공격하기 전에 얼른 진도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그야말로 승산 없는 전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가 신안 당사도를 거처 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가 은신한 사이 진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야말로 진도는 인간 도살장이 되고 있었다. 진도 사람들이 명량해전의의 뒷감당을 한 것이다. 왜군은 이순신 함대에 패배한 보복을 진도 사람들에게 했다. 왜군은 진도에 상륙해 진도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도륙했다. 그후에는 순신의 고향 아산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이순신에 대한 보복을 위해 조직된 왜군 특공대는 아산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고 이 와중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보복의 대상이 되고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진도 섬사람들이었다.

 

역사 기록에는 빠진 증거가 진도에 남아 있다.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일대의 정유재란 순절묘역의 무덤들이 그것이다. 이 묘역에는 진도 사람 조응량 등 232기의 시신들이 묻혀있다. 양반들 몇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조차 없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진실이 묘지로 기록된 것이다. 시신이 수습되어 무덤에 묻힌 이들이 232명일뿐, 실제 얼마나 더 많은 진도 사람들이 살육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까지 명량 해전을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억해야할까.

          2017.3.22 강재윤 페이스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