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사천, 여수 유적지 탐방) 충무공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하니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청풍헌 2017. 5. 5. 10:13

52 여수 거북선 축제  세미나 참석 및 진남관과 충민사 등을 보려고 길을 나섰다가까운 사천 선진리성과 조명군총을 거쳐 가기로 했다. 조명군총은 정유재란과 관련이 있다. 정유재란 시 조명 연합군의 사로병진작전 중 중로군의 지역에 속한 사천 선진리 왜성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둔하고 있었다. 정기룡 장군과 명의 동일원이 연합으로 진주성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채, 사천구성을 점령하고 사천신성을 공격했다. 성문을 깨트리고 성안에 들어서려는 순간 일본군의 반격과 명 진영에서 화약이 폭발하면서 대혼란이 일어 대패하였다. 사망자만 1만여 명이나 되며 이 때 전리품으로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가고 머리는 성 밖에 묻었는데 냄새가 나자 다시 크게 파고 묻었다. 이를 경관(京觀:시체를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봉하여 전공을 표하는 것) 이라 했다. 이후 주민들이 다시 이곳으로 옮겨 묻고 조명군총이라 하며 추모를 하고 있다. 일본에 존재하는 이총(코무덤)에서 흙을 퍼와 조명군총 옆에 묻고 위령 비를 세워 놓았다


선진리성으로 이동했다. 선진리성은 충무공의 2차 출동 시 사천전투의 현장이다. 또한 거북선을 최초로 출동시켜 승리 한 곳이다. 그 내용은 임진장초의 당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전라 우수사와 연합하여 적을 무찌르기로 하였는데 경상우수사의 장계에는 벌서 사천, 곤양을 점령했다하여 기다릴 수 없어 단독 출전했다 노량해상에서 원균을 만나 적들의 행방을 묻고 있는데 곤양에서 적선 1척이 나와 추격 불사르고 사천선창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거북선으로 돌격하고 유인작전으로 끌어내어 왜선 13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린 곳이다. 하지만 정유재란 기 이곳을 일본군이 왜성을 굳건하게 쌓아 전라도로 가는 길목인 진주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선진리 왜성을 복원을 했는데 천수각 터에 공군 조종사 위령탑을 세워 놓았다. 그 아래쪽에 사천해전 기념탑을 세워 충무공의 전적지를 추모하고 있으나 시멘트 구조물이라 초라했다. 기념탑 앞에는 국화송이가 시들어 있었다. 천수대 터에서는 시야가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아 해안 길로 가 바다를 살폈다. 이곳이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진 사천 해전의 장소임을 상상해 본다


차를 몰아 여수시문화원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1시간 정도 남아 진남관으로 향했다. 진남관을 둘러보니 해체복원공사를 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본 공사는 시작 안 되어 출입금지 펜스만 쳐져 있었다. 참으로 크고 웅장했다. , 우 끝부분이 많이 기울었다. 양쪽으로 기둥을 받쳤지만 위태했다. 입구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관리인에게 궐폐단에 대하여 물어보니 별다른 자료는 없단다. 고소대에 가보라는 말과 함께 리플렛을 주었다. 혼자서 고소대에 올라 비각 안에 있는 동령소갈,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를 보았다. 돌아 나오는데 관리인이 열쇠를 들고 왔다. 뭐지 하고 돌아보니 세상에나 열선루님이 계셨다. 이 무슨 인연인가? 문화재 자료 조사차 고소대 비각에 있는 비의 상태를 조사 나왔다고 했다. 덕분에 비각 안으로 들어가 직접 만져보며 살피는 영광을 누렸다. 두 사람의 연구원과 함께 와 이것저것을 조사했다. 비의 마모상태, 재질, 등등을 살피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기서 열선루님을 만날 줄이야! 충무공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하니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서울로 반출하여 광화문 근정전 근처에 묻혀 있는 것을 지역민들이 발견하고 미군GMC 트럭에 싣고 왔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 중 에 가장 크다고 한다. 중간에 흠결이 있는 것은 발굴 당시 포크레인 자국이며 좌 하단에 금이 가 있었다. 동령소갈은 통상 동령소갈비라 하는데 갈과 비는 다르다. 長方形(장방형)으로 지붕 모양의 蓋石을 얹는다. 반면 은 덮개 없이 碑身(비신)의 상단부를 둥그스름하게 만들고, 비에 비해 규모도 작다. 동령소갈(東嶺小碣)은 동쪽 언덕에 작은 비석이란 말인데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만들고 세운 경위를 적어놓은 갈이다. 함께 있는 타루비는 보물 제1288호로 1603년에 세운 비다.

[墮淚碑 營下水卒爲 統制使 李公舜臣立短 碣名曰墮淚 盖取襄陽人 思羊祜而望 其碑則淚立

墮者也 萬曆三十一年秋立 (영하(營下)의 수졸(水卒)들이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을 위하여 짧은 비석 하나를 세우고 타루(墮淚)라고 이름 붙이니, 대개 중국의 양양(襄陽) 사람들이 양호(羊祜) 를 생각하여 그 비를 바라보고는 곧 눈물을 흘렸다는 뜻을 취하여 세운 것이다만력(萬曆) 31년 가을에 세운다.] 


이후 세미나장으로 이동했다. 다시 보는 이순신과 여수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했다. 발제1 한국사 교과서로 본 이순신 장군 서술에 관한 고찰, 발제2 다시 보는 난중일기-여수를 중심으로, 발제3 여수 임진왜란 유적의 보존 실태와 활용방안-난중일기를 중심으로 이 세 가지 주제가 발표 되었다. 발제1에서 교과서에 기술된 이순신에 대한 분량은 전체적으로는 미미하다. 북한의 교과서와 외국의 역사 교과서를 비교 했는데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발제2는 난중일기에 기록된 여수지역의 지명 비정에 초점이 있었다. 공해, 관방, 유적, 지명을 중심으로 발제를 했다. 발제자는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인 김병호님이다. 어디가나 발로 뛰는 향토 역사학자가 있다. 문헌적, 향토적으로 연구하고 비정한 것을 발표 하였다.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수장(水場)안의 숙어(儵魚)를 숭어로 보았다. 또한 숭어를 세는 단위를 동()으로 판단했는데 노승석 박사의 정본과는 다른 한자다. 즉 숙어(儵魚)와 동()은 노박사의 정본에는 조어(鯈魚)와개()로 표기했다. 어떤 사료를 참조 했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숭어인지 피라미인지, 정어리인지 설왕설래했다. 발제3 조미선님은 이배사의 비격진천뢰님이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여수관련 유물과 유적을 정리했으며 활용 가능한 문화와 유물 및 전설을 정리했다. 이런 유적, 유물, 문화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 그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빅데이터 이용과 체험에 관하여 강조를 했다. 지역적인 고민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충민사를 가보지 못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귀가했다.

 

첨부: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동령소갈의 원문과 번역본은 여기에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719





2017.5.2. 여수시문화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