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이순신 정론' 전파를 위한 워크숍

청풍헌 2017. 12. 19. 14:06



이순신 정론전파를 위한 워크숍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에서는 이순 정론 확립을 위하여 많은 연구실적을 쌓고 연구논총을 발간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와 실적이 연구로만 그치는 경향이 있다. 실제 현장에 직접 뛰는 실무자들이 알아야 정론이 확립된다는 명재아래 워크숍을 실시하게 되었다. 특히 쟁점사항에 대한 확립이 필요하고 불필요한 정보를 거르고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워크숍을 한다고 했다. 이순신 연구소의 임원빈 소장님은 6년간 연구소장을 역임하시며 많은 연구실적을 쌓고 정론을 확립했다. 올해 임기가 만료되어 후임으로 제장명 교수님이 내정된 상태로 되었다. 퇴임을 하시며 가장 아쉬운 점이 연구 성과가 현장에 접목되지 못하고 연구에만 머무른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쟁점사항을 묶어 정론을 확립해보자는 의미이다. 특히 일선의 해설사와 축제 관계자들을 불러 정론을 전파하는 계기를 삼고자 했다. 이순신 유적이 산재해 있는 경남과 전남의 해설사와 축제 관계자, 연구자, 이배사 회원들을 초청했다. 순천향대학교는 사립대학교로 유일하게 이순신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1999년도에 연구소가 설립되어 많은 실적을 쌓았다.

 

다섯 명의 이순신 박사들이 연구를 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순신 정론1

임원빈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장은

1.영웅에 대한 시각 바꾸기

언제나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싸워 이긴 영웅으로 소개되곤 했다. 허나 실상은 언제나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워 이긴 지혜로운 명장이었다.

2. 임진왜란 해전 승리요인의 재인식

걸출한 명장인 이순신과 더불어 질적으로 우수한 조선수군이 있어 승리가 가능했다, 질적으로 우수한 조선수군은 우수한 화포를 장착한 최신예 함정인 판옥선과 거북선, 많은 수군의 숫자에서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3. 이순신의 해전전술

당파전술(총통포격전술), 거북선 돌격전술(근접포격전술), 학익진 등의 첨단 전술의 경연장이 되었다.

4.이순신 자살설의 문제점을 발표했다.

자살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에 “...이순신은 전투가 벌어지자 투구를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 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 자살이라는 설이 생겼다. 전사 상황은 당시의 기록인 선조실록, 이분의 행록, 은봉전서에 잘 나타나있다. 자살설의 배후로 식민사관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이순신 정론2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

1. 이순신의 성장 배경과 주요관력

이순신의 가계는 양반사대부로 사회적 배경이 좋았다. 그는 관직 생활 중 상관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곤 했다.

2. 조부 이백록의 기묘사화 연루설

중종 승하 시 금혼령을 어긴 죄목으로 처벌당하여 장사(杖死) 당했다.

3. 1차 출전 시 해전관련 쟁점

남로인가 북로인가가 쟁점이다. 등산=망산, 송미포=대포, 아자포=아지량으로 비정하고 합포해전의 장소는 진해구 합개 포구로, 적진포는 내산리 적포로 비정한다.

4. 한산대첩 시 주선수군의 전력

기존 59척에서 거북선 1척을 제외한 58척으로 확정함. 전좌 24, 전우 25, 경우 7, 귀선 2

5.칠천량 해전관련 쟁점

한산도에서 출전한 시점은 712일 혹은 13일이다. 400여명이 전사한 장소는 가덕도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선은 180여척, 일본군선은 330여척으로 추정된다.

 

이순신 정론3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소장(확정적)

1. 이순신의 해전참전 횟수

2323승에서 세분화 하면 49전이 되고 더 세분화 하면 52회가 된다. 통상 50여회의 전투로 표현할 수 있다.

2. 1차 출전 경로

기존 남로설이 아닌 북로설이다. 이는 난중일기에 기초하여 등산 바깥바다로부터 합포에 와서 정박했다, 등산에서 송미포로 들어왔다, 고성땅 아자음포등을 인용하면 송미포는 거제도 북단이다.

3. 명량해전 쟁점관련

해전 시각과 전투방법, 장소가 쟁점이다. 당시의 조류속도와 여러 자료에 의하여 전투시간은 916일 아침 8시경으로 추정된다. 철쇄설에 대한 문제는 전후 200년이 지난 후 이중환의 택리지에 최초 언급된다. 해전 장소에 대한 기존 주장과 다른 주장이 있는데 양도 북서쪽 넓은 지역으로 추정한다.

4.노량해전 참전국 수군의 병력/전과/피해규모

노량해전의 참전국 수군의 숫자는 조선수군 7,200, 명 수군 2만 명 내외, 일본군 8~1만여 명이다. 전과는 조선과 명 수군이 합심하여 200여척을 분멸하고 일본군은 6척을 침몰시켰다.

 

이순신 정론4

정진술 이순신 연구소 선임 연구원

1.거북선의 연원

거북선의 연원은 고려의 과선(戈船)이나 검(劍船)으로 추정된다.

2.거북선의 상장구조, 편제와 무장

거북선은 3층 구조다.(귀선도설)

승조원 중 무상은 선수에서 닻 물래를 다루는 사람이다.

3.이순신 2차 백의종군로 고증과 관련 쟁점

천안 보산원-공주 일신역 구간 개치경유, 공주 일신역-정천동 구간, 마치, 여원치, 황토재, 모여곡 등은 지자체와 쟁점사항으로 역원을 연결하고 조선 충독부 지도를 검토해서 고증 되었다.

4.임진왜란/정유재란 시 명나라 지상군/ 수군의 참전병력

1598년 명나라 수륙군의 참전 수는 7만여 명이다.(명신종신록)

 

이순신 정론5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1.16~19세기 일본의 임진왜란 문헌전개과정

다이코기(1637), 조선정벌기(1659), 구로다 가보(1687), 에흔 다이코기, 에흔 조선군기(1800)

2.조선시대 유입된 일본의 군사 문헌 정보

오에이기, 가게류의 목록, 난포문집, 본조 무림전, 난설헌 시집, 난바센키 등이 있다.

3.조선에 유입된 일본의 임진왜란 담론

구로다가보(1687), 해동역사(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 징비록

4.16~19세기 일본의 임진왜란 문헌에 보이는 이순신과 조선수군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입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순신과 임진왜란이 다뤄졌다.

5. 도고의 이순신 숭배-사료 없음. 명랑해전 철쇄설- 사료 없음.

 

토론시간에는 정병국 교수가 좌장으로 토론을 했다. 전남 해남지방에서 온 해설사들의 집중 질의가 있었다. 즉 명량해전의 장소와 해전시간, 철쇄설 등이 집중 질의 되었다. 제장명 교수님과 이민웅 교수님, 김시덕 교수의 명쾌한 답변이 있었다. 여러 쟁점사항을 한꺼번에 언급한 것은 아주 적절한 워크숍 이었다. 무엇이 쟁점인지를 알았으며, 정론이 무엇인지, 이론은 무엇인지를 안 것은 큰 수확이다. 정론은 언제나 뒤집힐 수 있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거나 근거 있는 논문이 나오면 새로운 정론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이것이 정론이다 말할 수 있다.

 

2017.12.14. 아산 순천향대학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