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순신

수군 재건 로 12(군학-용산) 걷는다는 것은 자기의 성찰이다

청풍헌 2019. 1. 10. 00:11

수군 재건 로 11(군영 구미-용)

통영은 이순신의 도시다. 태생이 한산도이며 400여 년을 충무공의 정신으로 나라를 지킨 남해안 관방이다. 통영을 알려면 이순신도 연결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한산도 제승당이 있으며, 충렬사도 있다. 눈으로, 머리로, 온몸으로 충무공을 알기 위하여 여러 활동을 했다. 2016년 수군 재건 로를 군영 구미까지 걷고 회령 포까지는 미 답사지로 남겼다. 새해가 되어 충렬사에 참배했는데 뭔가 행동적 결심이 필요하다. 몸은 자연스럽게 군영 구미로 향했다.

 

단 몇 줄의 글로 당시를 완벽히 복원할 수는 없지만, 근접은 할 수 있다. 군영 구미가 군학마을인지, 구수면 인지, 해창 마을인지는 여러 설이 있으나 직접 걸어보고자 길을 나섰다. 이부자리에서 미적거리다 9시경 집을 나섰다. 190km를 가야 하므로 부지런히 달려 12시경 걸음을 시작했다. 군학마을 해변은 수군 재건의 안내판이 있으며 해변으로 갑판을 깔아 산책로를 만들고 야영장도 만들었다. 지난 11일에는 새해 해맞이 행사로 사람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여기에 창고가 있었을까? 배를 타고 회령포로 갔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을 마주하며 보성과 장흥의 경계를 넘었다. 수문리 해수욕장 입구의 콘도에 현수막이 걸려 있어 살피니 지난가을에 장흥문화원에서 가을학기 문화강좌에 열선루님이 강의를 했다. 그때의 현수막이 지금도 걸려있었다. 반갑고 흐뭇했다. 수문리 해수욕장은 장흥의 대표 해수욕장으로 한여름의 흔적이 남았다. 수상구조대의 망루가 있으며 각종 구명장비가 있고 샤워장 등등이 그 흔적이다. 키조개 축제도 크게 열리는 장소다. 서해가 가까울수록 갯벌이 많다. 갯벌은 수심이 낮고 큰 내가 있어야 형성된다. 넓은 펄밭은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되고 방조제가 생겼다. 방조제 길을 걸었다. 지루한 곧은길을 계속 걸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등등 수많은 의문과 길 등이 주변 풍경과 함께 교차했다.

 

간척지 방조제를 걸어서 해창 마을에 왔다. 마을의 고갯마루에는 당산나무가 있으며 쉼터가 있다. 고개를 넘어서니 아늑한 남향의 마을이 있다. 길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까지 집이 들어서 전형적인 시골어촌 마을의 풍경이다. 마을 중앙에 당집이 있으며 당집의 울타리로 사용된 부사 비석이 3기 있다. 하나는 철비로 府使金公升集永世不忘碑(부사김공승집영세불망비)이며, 석비는 府使金公在獻永世不忘碑(부사김공재헌영세불망비)이고, 한 기는 마모가 심하며 府使□□□□□□不忘碑(부사□□□□□□불망비)이다. 부사 김승집은 1891년 장흥 부사로 부임했으며, 부사 김재헌은 1862년 장흥 부사였다. 해창은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다. 어느 시기에 창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을 아주머니의 이야기로는 본인이 시집오니 마을이 매우 번창했으며 여인숙도 있고 술집도 즐비하게 있었다고 했다. 각종 물산을 싣고 부산으로 다녔다고 한다. 이후에 통운 배가 비료를 싣고 다녔다. 정월 초사흘에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당산나무가 있는 상당, 당집이 있는 중당, 마을 선창의 하당에서 전통적인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선창으로 나가 마을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 통운 배가 비료를 싣고 이곳으로 드나들었으며 작은 선창의 끝부분에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석화 양식장 때문에 큰 배가 올 수 없으며 다른 도로가 생겨 해상교통로는 끊어진 지 오래 되었다. 이 작은 마을이 과거 조선 시대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고 보관하던 해창이 있었으며 이후에 통운 배가 각종 비료와 곡식을 실어 나르던 큰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즉 이곳이 장흥의 물류 중심이었다. 부사 비를 잘 정비하여 당집 옆에 세워 놓으면 마을의 큰 유산이 될 것이라 조언했다. 지금은 하루에 버스가 세 번 오는 한적한 시골 마을로 변했다. 빈집이 대부분이며 한 명 내지 두 명만 기거하는 전형적이 어촌마을이다.

 

다시 간척지의 제방 길을 걸었다 밋밋한 둑길을 한없이 걸었다. 건너는 다리가 하면 나올까 하고 지도를 수차례 검색을 했다.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지루한 길이다. 남상천 상류가 그리웠다. 꾸역꾸역 속도를 내어 원등마을에 도착했다. 갈림길에서 해안선으로 돌면 너무 멀어 관산읍으로 방향을 잡고 길을 걸었다. 차가 드문드문 오는 한적한 시골길이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버스를 한 대 볼 수 있었다. 일단 일몰 직전까지만 걷자고 마음먹고 속도를 올렸다. 지도를 보니 용산면까지는 가야 택시를 탈 수 있을 것이다. 발바닥이 불편하여 양말을 뒤집어보니 양발의 무늬 부분의 보푸라기가 까슬 걸렸다. 오랫동안 걸으려면 양말도 잘 골라 신어야 한다. 17시경 용산면 소재지에 도착하여 개인택시를 타고 원점 회귀했다. 20km5시간 동안 걸었다. 개운했다. 미적 그리지 않고 일찍 출발했다면 관산까지 갈 수 있었을 건데 무탈하게 걸은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어쩌면 산티아고의 예행연습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충무공 이순신은 무엇인가? 충무공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 길을 걷고 나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걷는다는 것은 자기의 성찰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혹은 어떤 결심이 필요할 때 하는 행위다. 나는 복잡한 세상에서 나의 위치를 성찰할 때 항상 걷는다. 이 길은 통영에서 매우 먼 곳이다. 200km나 떨어진 이곳을 걷는 이유는 이순신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재건하는 여정 중 군영 구미에서 회령포 구간이다. 군영 구미가 군학마을인지 해창마을인지 구수면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장군의 마음과 그의 정신을 살펴서 나에게 적용하기 위한 행동이다. 역사적 장소의 비정은 학자들의 몫이다. 수군재건로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 애민정신, 신임을 얻는 지도자의 바른 마음 등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20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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